多笑곳 이야기/운문(신작) 67

쑥부쟁이

쑥부쟁이 /성갑숙 인적 드문 잡살고개 엉성한 밑가지를 지팡이 삼아 섰다 쑥부쟁이 멀리 가마실은 아득하고 가을, 이맘때면 출가한 자식들 왁자한 옛이야기 더불어 평소 좋아하시던 달달한 믹스커피 올해는 커피 맛이 쓰다 쓰다 하신다 살림 밑천 맏이는 동해로 서울로 아산병원으로 지옥에서 천국으로 허방지방 다녀온 사이 고갯마루에는 어느덧 첫서리가 내리고 그렇게 정갈하던 꽃잎 하나둘 흩뿌리며 어서 내려가서 아프지 말고 잘 살아라 손 흔드신다 어머니

그렇게 젖은 몸으로

그렇게 젖은 몸으로 /성갑숙 하루 종일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선암사 사물소리가 찢어졌습니다 법고도 운판도 목어도 범종도 서울광장 장례행렬도 모두 찢어졌습니다 때마침 쏟아 붓는 장대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찰의 지붕 아래로 어둠은 내리고 바쁠 것도 없는 발걸음을 산 아래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길 끝이 내 고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장대비마저 숨죽인 부도전 앞에 발이 묶였습니다 고향을 향해 비스듬 돌아선 상월 선사의 승탑은 비통에 젖은 듯 고향발 장대비를 홀로 맞고 계셨습니다 어둑어둑 산사를 향하는 추적임에 엉거주춤 돌아서려니 어제 만났던 노스님이셨습니다 -스님 옷이 젖었습니다 -아, 젖은 옷은 씻으면 되지. 죽지만 않으면 돼. 한여름 장마 속 스님의 겨울 털신발은 푹 젖어있었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된..

(시) 마음으로 먹는 감

마음으로 먹는 감 / 성갑숙 무창포가 내려다보이는 펜션 로빈하우스에 묵은 적 있지요 날 밝으면 해루질 나가기로 한, 12월 대사리 때, 밤사이 겨울왕국 엘사가 다녀갔나 봐요 남쪽에선 보기 드문 눈 구경하느라 뜰방에 오도카니 나앉았는데요 껏껏껏 … 하얀 눈송이 머리에 얹은 붉은 전등 몇 버석이는 감나무를 달래고 있고요 뒷산에서 내려온 때까치들 떫은 맛 가신 것을 모르느냐고 해루질은 언제 갈 거냐고 껏껏껏 … 그림을 그린다는 펜션 주인 그녀의 그림 속에 떫은 기억을 지우려면 서리가 내리고, 폭설이 내려도 매달려 있어야 한다고 껏껏껏… 무창포발 눈보라 휘감아 도는 날 감나무 우듬지에 펼친 그물은 유년시절 허리춤 조이듯 조여 드네요

헛개나무 아래서/ 성갑숙

헛개나무 아래서 / 성갑숙 가을과 겨울 사이 헛장을 넣으며 입마개를 한 듯, 말 수를 줄여가는 나무를 올려다 본다 씨앗을 먼저 내어 준 열매의 약성에 대하여 뿌리의 깊은 인술에 대하여 사람들의 분분함을 털어내려는지 여윈 가지를 허공을 젖는다 또 얼마간의 헛헛함을 그 쓸쓸함을 애 써 감추려는 시간 박새 한 무리 날아와 넓은 품을 파고든다 (전남예술제 시화. 전남문학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