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笑곳 이야기/운문(신작)

그렇게 젖은 몸으로

가마실 / 설인 2021. 1. 12. 23:13

그렇게 젖은 몸으로
/성갑숙


하루 종일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선암사 사물소리가 찢어졌습니다
법고도 운판도 목어도 범종도
서울광장 장례행렬도 모두 찢어졌습니다
때마침 쏟아 붓는 장대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찰의 지붕 아래로 어둠은 내리고
바쁠 것도 없는 발걸음을 산 아래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길 끝이 내 고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장대비마저 숨죽인 부도전 앞에 발이 묶였습니다
고향을 향해 비스듬 돌아선 상월 선사의 승탑은
비통에 젖은 듯 고향발 장대비를 홀로 맞고 계셨습니다

어둑어둑 산사를 향하는 추적임에 엉거주춤 돌아서려니
어제 만났던 노스님이셨습니다
-스님 옷이 젖었습니다
-아, 젖은 옷은 씻으면 되지. 죽지만 않으면 돼.
한여름 장마 속 스님의 겨울 털신발은 푹 젖어있었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된다고!
조심스레 노스님의 존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참으로 맑고도 단호하십니다
설마 내게서 죽음을 읽으신 것일까요
상월 선사의 승탑은 여전히 비통에 잠긴 듯하고
그렇게 젖은 몸으로 고향땅에 묻힌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순천문단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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