多笑곳 이야기 437

그렇게 젖은 몸으로

그렇게 젖은 몸으로 /성갑숙 하루 종일 장대비가 내렸습니다 선암사 사물소리가 찢어졌습니다 법고도 운판도 목어도 범종도 서울광장 장례행렬도 모두 찢어졌습니다 때마침 쏟아 붓는 장대비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사찰의 지붕 아래로 어둠은 내리고 바쁠 것도 없는 발걸음을 산 아래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길 끝이 내 고향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장대비마저 숨죽인 부도전 앞에 발이 묶였습니다 고향을 향해 비스듬 돌아선 상월 선사의 승탑은 비통에 젖은 듯 고향발 장대비를 홀로 맞고 계셨습니다 어둑어둑 산사를 향하는 추적임에 엉거주춤 돌아서려니 어제 만났던 노스님이셨습니다 -스님 옷이 젖었습니다 -아, 젖은 옷은 씻으면 되지. 죽지만 않으면 돼. 한여름 장마 속 스님의 겨울 털신발은 푹 젖어있었습니다 -죽지만 않으면 된..

(시) 마음으로 먹는 감

마음으로 먹는 감 / 성갑숙 무창포가 내려다보이는 펜션 로빈하우스에 묵은 적 있지요 날 밝으면 해루질 나가기로 한, 12월 대사리 때, 밤사이 겨울왕국 엘사가 다녀갔나 봐요 남쪽에선 보기 드문 눈 구경하느라 뜰방에 오도카니 나앉았는데요 껏껏껏 … 하얀 눈송이 머리에 얹은 붉은 전등 몇 버석이는 감나무를 달래고 있고요 뒷산에서 내려온 때까치들 떫은 맛 가신 것을 모르느냐고 해루질은 언제 갈 거냐고 껏껏껏 … 그림을 그린다는 펜션 주인 그녀의 그림 속에 떫은 기억을 지우려면 서리가 내리고, 폭설이 내려도 매달려 있어야 한다고 껏껏껏… 무창포발 눈보라 휘감아 도는 날 감나무 우듬지에 펼친 그물은 유년시절 허리춤 조이듯 조여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