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는 시낭송에 대하여 / 글 : 이혜정
‘시낭송대회 유감’이라는 글에서 시낭송대회의 실망스런 부분에 대해서 많이 언급을 했지만
그건 대회에서 이런저런 이해관계가 얽힌 속에서 나오는 바람직하지못한 결과이고 시낭송에 대한 확실한 기준은 분명히 있습니다. 공정하고 무서운 심사위원인 청중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듯이 들어보면 정말 잘하는 낭송이 있고 그렇지 못한 낭송이 있습니다.
잘하는 시낭송이란 어떤 시낭송을 말하는 것일까요?
잘하는 낭송이란 우선 감동을 주는 낭송이어야 합니다.
감동을 주는 것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흔히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낭송의 기본이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 낭송의 기본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도 감동을 주는
낭송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남편이 아내에게 들려주는 낭송이라든지 자식이 부모에게 드리는 글.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읽어주는 글 등등... 감동적인 요소만을 따진다면 이런 낭송들이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런 낭송들은 굳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도 장단음이 정확하지 않아도 그 자체
로서 충분히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낭송대회에서 잘하는 낭송은 다릅니다.
시낭송대회는 말 그대로 대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기간 실력을 갈고 닦은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시낭송을 가지고 실력을 겨루고 상을 주고
시낭송가 자격증을 주는 대회입니다. 이런 대회에 나와서 위에서 언급한 정도의 감동만을 가지고 부딪친다면 절대로 통하지 않습니다.
대회는 나름대로 일정한 규칙이 있습니다. 물론 심사를 하는데 있어서는 심사위원들의 개인적인 의견이 많이 반영될 수밖에 없겠지만 일단은 정해진 큰 규칙에 따라 심사위원들이 나와서 심사를 하고 집계를 하고 시상을 합니다.
그렇기에 그냥 하는 낭송과 대회에서 하는 낭송은 다릅니다.
그러면 대회에서 낭송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무슨 일이든 기본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골프를 하든 볼링을 하든 수영을 하든 그 기본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잘 할 수가 있습니다.
낭송을 잘하려면 우선은 낭송의 기본을 잘 갖추어야 합니다.
낭송의 기본이란 정확한 암송, 정확한 발음, 정확한 장단음, 단전을 통한 깊은 성음(聲音),
시에 맞는 적절한 감정표현 등입니다. 일단은 이런 기본적인 요소들을 확실히 갖추고 난 후에
이런저런 것을 탓해야합니다. 장인(匠人)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설령 대회가
좀 파행을 해도 그 결과에 굴하지않는 당당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야합니다. 그 당당한 자신감은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일까요? 그건 분명한 실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본도 갖추고 있지 않은 사람이 대회의 결과를 두고 타당성을 따진다면 사람들에게서 비웃음을 듣게 됩니다.
시낭송대회의 첫 번째 규칙은 암송입니다.
‘낭송’이라는 말 자체가 낭랑한 소리로 암송을 한다는 뜻입니다. 암송은 외워서 보지않고 읊다는 뜻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회에서 암송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대상을 받아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며 큰 비난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세찬 비난 속에서 주최측에서 한 변명은 “우리는 시를 토씨한자 틀리지않고 외우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시의 감동을 얼마나 잘 전달했는가를 평가한다.”고 했습니다. 언뜻 들으면 맞는 얘기인 것 같지만 그건 시낭송대회라는 타이틀 자체를 스스로 거부하는 말임을 알아야합니다.
많이 양보해서 예선대회에서는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할지라도 본선대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공지문에 그런 글을 넣어야할 것입니다, “우리 대회에서는 암기를 다 하지않아도 감동적으로 낭송만 잘하면 됩니다.” ...
물론 암기만 잘했다고 큰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암기만 잘한 사람과 한줄 정도 틀렸어도 감동적인 낭송을 한사람 중에서 누구에게 상을 줄 것인가를 선택하라하면 참 난감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회의 규칙은 규칙입니다. 아무리 감동적인 낭송을 했어도 암기를 제대로 하지않은 사람에게 큰상을 주는 것은 대회의 규정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시낭송대회를 하는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낭송을 잘했어도 제대로 암기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건 제일 첫째가는 감점 요인입니다. 차마 아쉬워서 2등은 줄 수 있어도 절대로 1등은 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대회의 권위를 지키는 일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을 얘기하면 감동입니다.
어떤 시이든 시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그 시속에 녹아있는 감동을 목소리로 이끌어내어 청중들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합니다.
감동적인 낭송을 하기위해서는 암송(암기)을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낭독을 하면 감동을 줄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낭독으로도 분명히 감동을 줄 수가 있지만 낭송을 하면 그 감동을 몇배 더 효과적으로 극대화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같은 시라도 낭독을 하는 것과 낭송을 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눈을 감고 들어도 낭독을 하고 있는지 낭송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분간할 수가 있습니다. 글을 보고 낭독을 하면 감정이 활자 속에 갇히게 되어 감정도 그 틀 속에 갇히게 됩니다. 낭독은 2차원의 세계이고 낭송은 3차원의 세계입니다. 완전히 암송을 하고 또 그 감동을 완전히 내 가슴속에 담으면 시의 감동을 3차원의 공간속에 자유롭게 날개를 달아 훨훨 펼칠 수 있기에 낭독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을 전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낭송을 할 때 중요한 또 하나의 기본요소는
웅변조나 신파조는 버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런 낭송은 분명히 귀에 거슬리기 때문입니다. 많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잔잔한 낭송보다는 웅변조의 낭송이 더 어필할 수도 있습니다. 더 전달이 분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에 따라 분명히 잔잔하게 하는 것보다 좀 더 톤을 살려서 낭송해야 더 어울리는 시가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톤을 올려서 시를 낭송한다는 것과 웅변조로 혹은 신파조로 낭송한다는 것은 다른 개념임을 알아야합니다. 웅변조의 낭송은 그냥 웅변이고 신파조의 낭송은 그냥 신파이지 시낭송은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내용이 크게 잘 전달되었다는 것과 감동을 전해주었다는 것과는 또한 다른 것임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기에 시낭송대회에서 웅변조(신파조)의 낭송을 들으면서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리게 됩니다.
“어차피 시낭송이 감동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면 웅변조든 신파조든 무슨 상관이 있나.” 그렇게 생각하면 그냥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낭송대회는 포기해야하고 그리고 시낭송을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 또한 함께 포기해야합니다.
어떤 가수가 노래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그 노래를 듣는 사람들은 아마 대부분이 따라 울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가수가 꼭 노래를 잘하는 가수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중은 울지 모르지만 지각 있는 사람들은 쉽게 울지 않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전문가의 시각으로 판단합니다. 전문가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낭송을 해야합니다. 대중은 쉽게 감동시킬 수 있지만 전문가들은 쉽게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지금현재 열리고 있는 시낭송대회는 크고 작은 대회를 다 아우르면 수십개가 됩니다. “시낭송대회 유감”에서 썼듯이 이런저런 다양한 대회가 있습니다. 공정한 대회가 있는가 하면,
자기식구 챙기기만 하고 끝나는 형편없는 대회도 많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낭송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대회의 시상 결과 여부를 떠나서 무섭고 공정한 심사위원인 관객(청중)들이 있는 한 진정한 대상(大賞)을 받을 사람은 분명히 있습니다. 대회에서 상을 받든 못받든 , 대회가 파행을 하든 어찌하든 상관없이 진정으로 낭송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낭송가가 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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