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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동화) 땅꼬마의 승리

가마실 / 설인 2011. 3. 31. 21:35

(동화)

땅꼬마의 승리

글 / 성갑숙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는 들길은 첫 손님 맞을 준비를 끝냈다. 새벽안개가 걷히고, 길 양쪽으로 너울진 풀잎에는 아침 햇살을 받은 이슬이 반짝반짝 빛났다. 코땀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새벽 공기가 신선하구나. 평소대로 뛴다.”

  “네에?”

  군민체전의 날 아침, 만물선생님은 코땀이를 따로 불러 세웠다. 

  “준비운동으로 무리가 따른다만 호흡조절 잘 하고, 공설운동장   까지 뛰어서 체육대회에 참석해라.”

  “……?”

  창남초등학교 대표선수들은 모두 학교에서 집합하여 차를 타고 공설운동장을 향하려는데, 꼬땀이는 이해할 수 없어 만물선생님을 올려다보았다.

  “준비됐나?”

  “옛!.”

  “우리 학교 대기석은 공설운동장 서쪽 담 밑이다.”

 

  교장선생님은 공설운동장을 향하는 차안에서 들길로 혼자 뛰는 코땀이를 발견했다.

  “아니, 시합을 앞둔 선수에게 무리가 아닌가요?”

  교장선생님은 당장 차를 세울 듯 펄쩍 뛰었지만 만물선생님은 목례만 할뿐 차창 밖을 내다보지도 않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거야.’ 차 안에 있는 선수들이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났다.


  코땀이가 들길에서 힘찬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점점 다가서는 공설운동장. 멀리 본부석 지붕에서 내리 뻗은 만국기의 행렬은 어젯밤 꿈속의 레이스만큼이나 길어 보인다.

  코땀이는 콧잔등에 송송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운동장 입구로 들어섰다. 북새통을 이룬 장사진을 뚫고 들여다 본 본부석은 아직 썰렁하다. 들길을 향해 등을 밀던 만물선생님이 서쪽담 밑에서 기다렸다는 듯 손을 든다.


  6학년 전체에서 키가 제일 작은 아이.

  한겨울에도 남 앞에 서면 콧등에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아이.

  예쁜 여자 짝꿍을 만났으나 단 한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아이.

  체육대회 날짜가 잡히면서 코땀이의 하루 일과는 공설운동장을 다녀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공설운동장은 읍 소재지에서 완전히 벗어난 들 가운데 새로 지어졌다. 교통 혼잡을 막기 위함이라고들 하는데 이유야 어찌됐건 한적한 시골의 코땀이 학교에서 가까우니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그 곳까지 장거리 연습코스로 정했으니 코땀이는 다행이다 싶었다.

  첫날 공설운동장으로 향하던 만물선생님은 목표를 샘터 들어가는 길목 전봇대까지로 삼았다. 돌아올 때는 심호흡을 하며 긴장된 근육을 풀면서 걸어왔다.

  “운동장을 돌 때도 마찬가지다. 한바퀴 한바퀴마다 목표를 두어라. 결승선까지 얼마나 남았나 계산하며 그 끝을 목표로 두면 부담이 와서 쉽게 지친단다.”

  며칠 후부터는 샘터 길목을 조금 더 벗어난 함박촌 입구 정자나무까지 돌아서 왔다. 코땀이는 목표물을 앞두고 하루 이틀 반복하다보니 자신감이 생겼다.

  “오늘은 공설운동장까지 가 볼만하지 않나?”

  들길 달리기연습 이주일째, 몸을 푸는 코땀이에게 만물선생님이 넌지시 물었다.

  “예, 자신 있습니다.”

  사실 의욕이 앞섰다.

  “여기서 3000미터 정도의 거리이니 평소 우리가 오고 간 거리   를 뛰어서 가는 거다. 그동안 연습한 양으로 보면 충분한 거리    다.”

  새 운동장을 보는 것이 소원이던 코땀이는 그동안 돌아서던 샘터 앞 전봇대나, 함박촌 정자나무가 언제 지났는지도 모르게 공설운동장 문턱을 밟았다.   

  건물이라고는 눈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는 들 가운데 우뚝 솟은 공설운동장. 그 웅장함에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텔레비전에서 본 올림픽 경기장만큼이나 커 보이는 아치형 건물이 떡 버티고 있었다.

  “올 봄에 새로 지었단다.”

  만물선생님은 첫 출전을 염려했음인지 코땀이 더러 본부석을 향하여 서라고 했다. 가슴을 넓게 펼치고 운동장을 끌어안으며 심호흡을 하라고 했다. 아버지의 품이 그리운 코땀이에게 만물선생님은 오늘 진짜 만물이었다.


  만물선생님이 6학년 담임을 맡게 된 것은 악몽을 꾼 다음 날이었다.

  만물선생님은 시골 학교에서 몇 년째 육상부를 맡아왔고, 운동에 어울리지 않는 음악과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서 항상 여선생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러니 여자 아이들의 질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만물선생님’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만물선생님, 그보다 폐교를 앞 둔 창남초등의 개구쟁이들에게는 ‘독물’이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 전교 학생 수가 적다보니 각 분야 재주꾼들을 발굴하여 바깥으로 내 보내기 위해 만물선생님은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코땀이가 마라톤 선수가 된 것도 만물선생님의 머리에서 나왔다.


  단체 벌을 받던 날,

 ꡒ운동장 무한정!ꡓ

  만물선생님은 말을 마치자 제일 뒤에 처지는 아이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모두들 사나운 짐승에 쫓기듯 뛰쳐나갔다.

  한 바퀴 두 바퀴 간간이 울음 섞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 만물선생님은 독수리가 된다. 그 독수리는 엄마 품에서 이탈하는 병아리를 낚아채려고 무섭게 달려드는데, 어느 날 의외였다.

  한참 운동장을 돌다 어느 순간 올랐는지 만물선생님은 멀찍이 구령대 높이 서 있었다.

  때를 놓칠세라 기회주의자들은 하나 둘 울음을 토하며 쓰러졌다.

  그러나 만물선생님은 얼음 동상처럼 서 있었다.

  “운동장 무한정!”

  그 말로 보아 오늘 벌은 쉽게 끝맺음하지 않겠다는 뜻인데 꺽다리 삼총사와 뒷자리 뼈다귀들은 뭔가 잘못 판단한 모양이다. 한 눈을 찡긋 감고 운동장 가에 널브러진 폼이 가관이다.

 

  단체 벌은 항상 꺽다리 삼총사가 원인이다. 그 날도 맨 뒷자리 앉아있어야 할 총사 한 명이 코땀이 뒷자리까지 숨어들어 가방을 뒤지다 걸려들었다.

  코땀이와 앞자리 몇몇 아이들은 게거품을 물었다.

 ꡐ뻑 하면 단체 벌!, 단체 벌!, 오늘은 기어코 일을 내버리리라!ꡑ

  만물선생님은 이른 봄 내내 이상하리만치 단체 벌을 고집했다.

  처음 한 두 번은 만물선생님도 뒤쫓아 뛰었기에 온 운동장이 울음바다가 되다시피 했다. 운동장 도는 횟수도 거듭할수록 늘어났다. 마침내 무한정까지 치달았다.


  단체 벌을 서고 돌아오는 하교 길은 항상 휴식이 필요했다. 나무 그늘에 늘어진 아이들은 이제 꺽다리 삼총사를 원망하기보다 만물선생님을 더 원망했다.

  그러다가 코땀이를 돌아보며 모두들 박수를 보냈다

  “야, 코땀이 오늘 대단했어. 어떻게 된 거야. 네 다리에 모터    달았어?

  그랬다. 단체 벌은 코땀이의 승리로 끝났다. 마지막까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코땀이는 그만 하라는 만물선생님의 호령이 떨어지고도 한바퀴를 더 돌았다. 마치 세상의 끝을 보려는 듯…….

  그리고 다음날 체육시간에 코땀이는 삼천 미터 대표선수로 발탁 됐다.


  군민체전에 구기종목 선수를 배출 못한 창남초등의 선수들은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해가 서녘에 가까울 무렵 모든 경기는 거의 결승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작은 고추는 매웠다. 코땀이의 학교는 구기종목을 제외한 육상 전 종목이 메달 권에 진입했다.

  이제 군민체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삼천 미터 장거리 달리기가 남아있다.

  코땀이는 아침에 준비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몸이 굳어 뛰지도 못할 뻔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학교야?”

  “몇 학년이야?”

  다리가 쭉 빠진 녀석이 삼천 미터 선수 대열에서 코땀이를 내려다보고 물었다.

  등판을 보니 구기종목에서 이미 기선을 잡은 듯한 학교의 아이다.

  코땀이는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주눅이 든다.

  이때 만물선생님이라도 곁에 있으면 좀 나으련만 멀리 릴레이 결승 선수들 준비로 바쁜 모습이다.

  읍내 학교에서는 선생님도 많아서 여기저기 종목별 선수들을 격려하고 목도 축여주는데 코땀이 학교는 그렇지 못하다.

  코땀이는 작은 어깨를 쫙 펴며 몸을 비스듬히 틀었다. 등판의 글자는 폼으로 붙여놓았냐는 말은 생략하고

  “6학년이다.” 했다.

  “그 키에?”

  코땀이 등판을 슬쩍 돌아본 녀석은 그러면 그렇지 오죽하면 너 같은 아이가 뽑혔을까 하는 투로.

  “야, 그 학교 폐교 될 거라며……?” 했다.

  그 소리에 앞뒤에서 힐끗 힐끗 쳐다보았다.

  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코땀이다. 만물선생님의 기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너희들, 학교가 없어질 때 없어지더라도 그동안 지켜온 자존심   은 뭉개지 말아야 될 것 아니야!”

  연습 도중 힘들고 지쳐 주저앉으려면 만물선생님은 여지없이 호통 치며 육상 강호의 전통을 내세우며 기를 세웠다.


  본부석 앞 삼천 미터 장거리 출발선은 질서정연했다.

  각 학교에서 자랑스레 배출된 선수들이라 다들 건장하고 사기도 충천했다.

  만물선생님은 한가운데 폭 파묻힌 코땀이와 눈을 맞추려는 듯 본부석 밑으로 뒷걸음질치며 발꿈치를 들었다. 코땀이는 만물선생님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땅!”

  출발신호가 울렸다.

  “와! 와~아!”

  연습 때와 달리 욕심이 앞서는지 모두들 초반부터 전속력을 내는 듯 했다.

  “출발할 때, 욕심을 내지 마라.”

  함성 속에 만물선생님의 음성이 귓전을 때린다.

  “출발 후 혼잡한 대열을 피하고 한 걸음 뒤에서 체력을 보존해   라.”

  선두선수들이 제자리를 찾느라 잠시 부딪히며 다리가 꼬였다.

  “목표는 한바퀴씩 페이스대로.”

  경기는 중반을 넘어서고 운동장의 함성은 본부석 귀빈석까지 몸을 일으키게 했다. 선수들의 거친 숨소리로 보아 성급한 승부욕에 호흡조절을 제대로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코땀이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선두 대열에서 한 발짝 뒤진 중간쯤 위치에서 본부석 앞을 지날 때 만물선생님을 힐끗 주시했다. 선생님의 손은 아직 허리에 얹혀있다. 코땀이는 껑충껑충 앞서 뛰는 선수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잦은 보폭에도 기죽지 않으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코땀이는 이상하게도 키 큰 아이들 곁에 가면 주눅이 든다. 작은 키를 낳아준 엄마는 원망하려해도 없다. 할머니가 하늘나라에 있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컸다.

  젖배를 곯아서 그런다며 구멍가게를 하는 할머니는 항상 먹거리를 코땀이 가방에 챙겨 넣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꺽다리 삼총사는 코땀이 주위를 맴돌았다.

  먹거리가 없는 날은 여지없이 가방을 들어 주어야 한다. 먼 꺽다리 집까지 갖다 주고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다음날도 없으면 어제 같이 놀아준 댓가는 돈으로 계산되고 날이 갈수록 빚으로 불어났다. 그 빚은 폐교를 앞 둔 학교 앞 구멍가게에서 해결됐다. 할머니가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를 틈타서…….

  코땀이는 간간이 할머니 이야기를 일기장에 썼다. 불쌍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쓰고 그것은 친구들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나 만물은 아이들 사생활에는 관심이 없는지ꡐ참 잘했어요’ 둥근 도장만 팡팡 찍어 내 주었다.


  삼천 미터, 이제 두 바퀴를 남겨두고 있다. 전 응원단이 일어서서 거대한 타원을 이루었다.

  서쪽 담 밑의 함성을 잠재우며 본부석을 지나던 코땀이는 만물선생님을 찾았다.

  얼음 기둥같이 서 있던 만물선생님의 굳은 입술이 움찔했다.

  “가!ꡓ

  만물선생님의 오른손이 높이 솟았다.

  순간 까만 제비 한 마리가 흐린 날 먹이를 찾듯 자세를 낮추었다. 운동장에 그어진 하얀 띠를 따라 비행을 시작했다.

  지친 타조의 다리가랑이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오며 서늘한 가을바람을 날개에 실었다.

  운동장이 떠나 갈 듯 하던 함성은 찬물을 끼얹은 듯 질려버렸다.

  “햐! 기~가 막히구먼.”

  “저 조그만 것이…… 어디 있다 튀어 나왔어?

  “어느 학교야?”


  읍내 식당에서 푸근히 저녁밥을 챙겨먹은 코땀이 학교 일행은 밤중이 되어서야 학교에 도착했다.

  인근 동네 어른들이 횃불을 밝히고 꽹과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흥겨운 장단에 발이 부르트도록 땅바닥을 비비며 춤을 추는데 정작 코땀이의 발은 흙 묻을 새가 없다.

  할아버지 교장선생님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코땀이를 업고 운동장을 돌고, 온 동네 사람들이 번갈아 업고 덩실댔다. 코땀이는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면서도 만물선생님을 찾았다.

  멀찍이 구령대 밑에 어제와 다름없는 얼음기둥 같은 만물선생님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곁에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같은 녀석을 몇 데리고 섰는데 자세히 보니 꺽다리 삼총사이다.

  꺽다리 삼총사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마치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 하다.


  그 날 저녁 꺽다리 삼총사의 눈에 비친 코땀이는 1학년 때부터 데리고 다니던 땅꼬마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