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신문 칼럼)
행복한 삶
성갑숙
웃녘으로부터 간간이 단풍 소식이 들리지만 올해는 온전한 가랑잎을 밟아보기는 글렀다는 소리가 섞였다. 불볕더위 속에서 청춘을 불사르던 짙은 녹음은 태풍과 잦은 비로 짓이겨지고, 그나마 걸친 것 애처로이 흔들며 아쉬워 하는 가을을 바라보니, 우리 삶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그러나 자연은 이 가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며 또 다른 겨울을 기다림과 설레임으로 준비한다. 사람도 이렇듯 고달픔 속에서 새 삶을 준비하고 새로운 만남으로 항상 가슴 설레며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은 있는 것, 인연을 맺었다 다시 헤어져야 할 시기에는 걸친 것 툴툴 털어 버리고 또 다른 만남을 준비하는 여유를 가진다면 분명 행복한 삶일 것이다.
지난밤에는 우연한 기회로 근래에 보기 드문 귀인을 만났다. 하루 세끼 밥상 앞에 앉는 반복된 일상이 제일 아깝고 억울하다는 그분을 따라 어둔 오솔길을 들어섰다. 그 분은 그 오솔길을 자신의 길이라고 했다. 길은 항상 그 자리에 있건만 들어설 때마다 초행같이 설렌다는 것이다. 굽이굽이 돌아가다 인적없는 좁은 길에 섬칫 멈추어 섰다. 시동을 끄고 정적을 잠재우면 섬뜩 등을 누르는 어둠의 위압을 즐길 수 있는 그 장소는 초행인 나를 감동시켰다. 낯선 찻집에서 따뜻한 찻잔을 마주하자 차향만큼이나 감미로운 그분의 삶이 한 겹씩 벗겨졌는데
“살아가면서 때때로 맞는 초행길은 언제나 설레임으로 다가서듯 죽음도 초행이니 나는 지금 설레임으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네”
생은 긍정적이고 즐길 줄 아는 자만이 누릴 수 있나보다.
번데기는 허물을 벗어 던져야 화려한 날개를 펴고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뜰 수 있다. 이렇듯 자연은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벗어버려야 할 거추장스런 삶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고 고통스럽게 껴안고 있는 안타까운 삶이 있다. 고난의 길을 뚫고 좁은 문을 들어서려면 허무도 억울함도 스스로 삭혀내야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한때 나는 어린 둘째 아이와 함께 병원 셔틀버스에 몸을 실은 적이 있다. 여느 버스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고통과 근심에 찬 눈빛이며 부자연스런 몸놀림에 할머니 병문안 간다고 들떠있는 아이의 행동이 민망해졌다. 들썩이는 어깨를 다독이며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주고 있는데 뒷좌석에서 노기 어린 질책이 들렸다.
“자식은 키울 때뿐인 것이여!”
“냅둬! 그래도 저럴 때가 좋을 때여”
“이삐기야 허제. 이뻐도 저러지 말아야 혀. 괘씸하고 억울하단 말여. 품안에 자식이제, 다 지 잘나서 저절로 큰 줄 알어”
노인병동을 향하는 그분들의 뒷모습은 삶의 끄트머리에서 현실을 부인하고 싶은 절박한 분노가 삭신을 삭이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며 그분들의 삶을 짚어 보았다. 그 어느 낯선 길에서 설레임과 즐거움이 아닌 또 다른 억울함을 낳고 있을 것 같은 분노 속 그늘진 삶을...
같은 하늘 아래 하루 세끼 허기를 채우는 것은 너 나 다를바 없는데 개개인의 삶을 들쳐보면 이토록 상반될 수가 있을까. 하루하루가 설레임으로 즐거운 삶이 있는가 하면 억울함과 허무로 아픔만 더해가는 삶이 있다. 아픔도 나의 생이니 즐기며 산다는 어느 시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아무튼 주어진 자신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며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갈 일이다.
다시 무엇이 되어
성갑숙
선택 받아야만 줄 선다.
둘레를 빙 돌아
고철 울타리
종량제 바람에 놀란 명함 한 장
울타리 밖을 기웃거린다
목마른 세상
산 같은 이야기 쓸어안고
푸른 하늘 꿈꾸는 신문지더미
땀 흘려서 고물 되나
고물 된 세상은 고통이다
다시 태어나야 하리
소주병에 고삐 풀린 이십원 인생도
삼십원 맥주병에 쏟아버린 사랑도
부대끼며 서로의 아픔 귀 기울이며
헌 책 손 까만 눈동자
길을 연다
-시 재활용 쓰레기장 전문-
한줄기 소나기가 지상에서 사라져 가고 눅눅한 기운이 어깨를 짓누른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력감에 빠진 하루가 사라지고 있다. 무엇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마모되어 돌아가는 육신에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 그곳을 가자! 망가지고 이지러진 몸둥아리로도 다시 무엇이 되고자 꿈틀대는 곳. 푸른 하늘 가득 꿈을 키우는 곳.
열람실 구석자리 수북이 쌓인 폐지더미에 시선이 꽂힌다. 한달에 두어번씩 들리시던 할아버지께서 무슨 연유인지 발길을 끊으셨다. 특히 신문지를 모아놓으면 고마워하며 가져 가셨는데 연락처라도 알아두었으면 아쉬워하길 벌써 두달이다.
나는 팔을 걷어부쳤다. 끈을 찾아 나란히 늘여놓고 폐지를 분류하기 시작했다. 폐지는 명함 크기만 되어도 재활용이 되며 폐지의 질은 우유팩이 제일 좋다. 그 다음은 신문지, 기타 종이상자와 각동 코팅지는 함께 분류한다. 일손이 더디어질수록 그동안 폐지관리에 얼마나 허술했는지 고개가 숙여진다. 원생들이 남긴 과제물 나부랭이를 따로따로 모아두었으면 번거로움이 없었을텐데 조각이 나뒹굴 때마다 신문지 갈피에 손쉽게 끼워버린 것이 또 다른 일거리를 장만했다. 할아버지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묵직한 뭉치 세 개를 짐칸에 싣고 퇴근하는 길목 재활용센타를 들어섰다. 지난해 들렀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뭔가 질서정연해진 모습에 어리둥절해져 돌아보니 고철이던 울타리가 벽돌로 바뀌어 있었다. 바람이 불면 폐지 나부랭이가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도시 미관상 새 단장을 한 모양이다.
혼자 들기 벅찬 신문지 세 뭉치 합해야 삼천원. 그러나 이곳에 오면 생기가 돈다. 고물 되어 뒹굴던 생이라도 무엇이나 다시 꿈을 키운다. 바삐 돌아가는 세상 눈만 뜨면 억억하며 무너지는 사회에서 몇십원도 안되는 종이 조각에 연연하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치부하기엔 우리는 너무나 지쳐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언젠가는 퇴색하고 마모되어 제 기능을 잃게 마련이다. 그러나 가슴마저 싸늘히 식혀서야 되겠는가. 다시 태어나고자 폐지더미에서 울타리 밖을 기웃거리는 명함이여 힘을 내자. 비록 삶의 무게가 지탱하기 힘들지라도 따뜻한 가슴 모두어 푸른 꿈을 품자. 우리는 무엇인가 될 수 있음에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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