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의 분류-성인동화
빈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길섶에 형편없이 생겨먹은 늙은 벅수 하나가 뚱하게 서 있었습니다. 넙데데한 메주볼의 곰보딱지에, 반쯤 떨어져 나간 주먹코를 달고 온몸에 버짐꽃까지 활짝 피어오른 돌벅수였습니다.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벅수는 맨날 옴팡입을 쩌억 벌리고 강냉이 이빨을 드러내 보인 채, 잘록한 모가지를 갸우뚱히 비틀어 뽑아 언덕 아래 빈 마을를 흘기듯 굽어보고 있었습니다. 송충이 눈썹을 한껏 밀어올려 퉁방울 눈알을 부라리긴 했지만 어깨춤을 옹크리며 깍지손을 모아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만 했습니다. 게다가 머리꼭대기에 벙거지를 살짝 눌러쓰고 염소수염까지 멋드러지게 매달고 있었습니다. 발길 하나 닿지 않는 언덕엔 키를 덮은 억새만이 수북히 자라나 있었습니다. 소슬바람이 언덕을 찾을 때 쯤이면 언덕은 온통 허연 억새꽃으로 뒤덮였습니다. 그런 어느 소슬한 밤이었을 것입니다. 강아지라도 후려내려는 듯 하눌타리 바스락거리는 마른 덩굴 너머로 새파랗게 볼이 깎인 손톱달이 처연하게 내걸린 밤이었습니다. 파르스름한 달빛 조각이 언덕 위로 비듬처럼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언덕 아래 빈 마을은 희뿌연 달빛 속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강아지 짖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소슬바람이 언덕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그때마다 억새들은 오소소 오소소 스산하게 몸을 떨었습니다. 어디로 날아가는지, 밤기러기들이 기러기줄을 지어 기이럭 기럭 기이력이며 어두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습니다. 기러기 떼를 쫓기라도 하듯 벅수는 천천히 모가지를 뽑아 어두운 하늘을 한동안 쳐다보았습니다. 기러기는 간 곳이 없고 손톱달만 바람에 찢긴 구름 속에서 열심히 자맥질을 하고 있엇습니다. 홀린 듯 바라보는 벅수의 번들거리는 퉁방울 눈 밑으로 언뜻 쓸쓸한 빛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결코 짙은 달그림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찌 이리 맘이 싱숭생숭하는 공.....다 어디루 떠나겠다는 게야...." 어둠 속으로 사라진 기러기에겐지, 구름에 밀려 내달리는 손톱달에겐지, 벅수는 마치 투정하듯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다 떠나가는 판에 넌 뭘 지켜보겠다구 꽁 박혀있는공...허긴 너라두 없었더라면 내 가슴은 미어텨져 버렸겠지만서두....." 벅수는 마치 곁에 누가 있기라도 한듯 또 중얼거렸습니다. 아무래도 손톱달에게 하는 말인가 보았습니다. "내가 꼬옥 알고 싶은 것은 말이야. 넌 왜 동지섣달 찬물에 얼굴이라두 씻은 듯 뚱하게 박혀 있느냔 말야. 기러기처럼, 바람처럼, 저 구름처럼 훨훨 떠나지 않구설랑....에끼 벅수같은 동무야!" 벅수같은 동무야, 하는 말이 스스로도 웃으웠던지 벅수는 얼굴 가득히 잔주름을 잡으며 쿡쿡 웃었습니다. "다정한 내 동무같아서 하는 말인데, 우리 심심풀이로다 서루 얘기나 주구받구 하자 이거야." 벅수는 무척 심심했었던가 보았습니다. 넙데데한 메주볼에 가득히 서서히 장난끼 같은 것이 번져들고 있었습니다. 손톱달에게 어떤 수작이라도 단단히 붙여보려는 속셈이 분명했습니다. 벅수는 손톱달을 향해 대뜸 수퉁니같은 강냉이 이빨을 쩌억 벌렸습니다. 그러자 벅수의 이마에서는 꿈틀, 굵고 검은 갈매기 세 마리가 커다란 나래를 펴고 날아올랐습니다. ____야아, 버억수우야아_____ . 언덕 마루가 끄르릉 울렸습니다. 억새숲에서 놀란 장끼 한 마리가 꼬공거리며 솟구쳐 올랐다가 잿빛 어둠 속 어디론가 사라져갔습니다.(중략) ____ 야이 벅수야____ 넌 왜 맨날 벅수처럼 뚱하게 서 있냔 말이야____ 벅수는 반쯤 울고 있었습니다. 왠지 울어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였습니다. ____ 야이 벅수야, 넌 왜 맨날 벅수처럼 뚱하게 서 있냔 말이야, 넌 왜 맨날 벅수처럼 뚱하게 서 있냔 말이야, 넌 왜 맨날 벅수처럼 뚱하게 서 있냔 말이야, 뚱하게 서 있냔 말이야, 서 있냔 말이야, 이야, 야....... 손톱달이 놀리듯이 자꾸만 되물어왔습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말문이 꽁 막히고 말았습니다. 벅수는 자신이 뚱하게 서 있어야 하는 까닭을 곰곰히 생각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이 손톱달은 하눌타리 마른 덩굴사이를 쑤욱 내려와 서산마루에 살짝 얹혀 있었습니다. 여전히 억새들은 기운 달빛을 풀어던지고 있었고 빈 마을에서는 개짖는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외로움이 가슴 속을 저미어왔습니다. "다 어디루 떠나갔을꼬..." 문득 빈 마을을 남기고 떠나간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언덕길을 딸랑거리며 오르내리던 아이들 모습도, 밤이면 달을 향해 캉캉 짖어대던 강아지 소리도, 머리카락을 헤헤 풀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밥짓는 연기도 그리워졌습니다. "차암, 북어두름 둘러본 지는 또 얼마나 오래 되았는공......" 버꾸를 치며 언덕을 올라온 마을 사람들이 북어두름을 처억 걸어주던 그 옛날 정월 대보름날이 눈에 선히 떠오릅니다. 지금은 모두 떠나버렸으니, 웬 뚱딴지 같은 생각일까마는 그래도 벅수는 그 옛날이 그리워서 손가락을 꼼작거려 봅니다. "허허참, 무슨 바람이 이리두 모질꼬......." 전쟁보다도 더 모질다 싶었습니다. 그 모질던 왜란도 동학혁명도 6.25도 다 이겨냈는데 우렁이 껍질처럼 텅 비어버리다니, 벅수로서는 알아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어느새 손톱달의 허리가 서산마루에 반쯤 잘려 있었습니다. "이젠 너마저 내곁을 영영 떠나겠단 말이지?" 벅수는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벅수는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손톱달이 아주 떠나버리기 전에 대답이라도 한 마디 해줘야 속이 풀릴 것만 같았습니다. 벅수는 힘껏 소리질렀습니다. ____ 사람들이 보구싶어 기다린다 왜?_____ 손톱달이 꼴깍 넘어가다 말고 헬끔 내려다 봤습니다. 벅수의 퉁방울 눈가엔 눈물이 철철 넘쳐 흐르고 있었습니다. 손톱달이 맞고함을 질렀습니다. ____ 사람들이 보구 싶어 기다린다 왜, 보구싶어 기다린다 왜, 기다린다 왜, 린다 왜, 왜.... 한 점 메아리와 함께 언덕 부근도 점점 짙어가는 어둠 속에 잠겨들었고 벅수의 모습도 어둠 속에 스러져갔습니다. 그때 억새풀이 흔들리며 언덕 아래로부터 몇 개의 사람 그림자가 나타났습니다. 보퉁이를 이고 진 그들은 억새숲을 헤치며 언덕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줄래줄래 뒤따르는 아이도 하나 끼어 있었습니다. "아부지 안즉도 멀었당가?" "아녀, 요 언덕만 넘으면 곧장 나올꺼이다."(중략)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의 어머니쪽을 힐끔힐끔 돌아다봤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풋콩처럼 생콩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잔뜩 토라진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낸들 알 수가 있었나......무신 바람이 불었던지.....나두 모르겠구먼 구신한테 씌었든가..." 아이의 아버지는 낮게 중얼거리며 담배를 태물었습니다. 뻑뻑 빨아댈 때마다 볼이 움푹 패이고 눈자위가 꺼져 들어간 얼굴이 빠알갛게 드러나 보였습니다. "에이그 참, 어서 내려가욧!" 말 한 마디 없이 생콩해 있던 아이의 어머니가 꽥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가 화들짝 놀랬습니다. "으응? 그럽세. 허허허........ 내 다신 요길 떠나지 않으리라. 아암 또다시 떠난다면 내, 개아들이지, 아암, 개아들이구 말구 . 허허허...." 아이의 아버지는 자꾸 너털웃음을 웃어댔습니다. "요기서 날 샐 작정이에요?" "날 샐 수야 있는가. 그래두 볼 일은 쬐금 보구가야제." 아이 어머니의 재촉에도 아이의 아버지는 굼뜨게 뭉그적거리며 보퉁이를 풀어헤쳤습니다. "갑자기 뭐하는 거에요?" "북어두름이제. 그냥 갈 수가 있간디. 요그서 붙박혀 살려면 인사는 드리고 살아야제." 아이의 아버지는 길섶의 무성한 억새숲을 기웃거렸습니다. "아이고 벅수하네(할아버지) 여그 계셨구만." 아이의 아버지는 벅수 앞에 덥썩 두 무릎을 꿇고 연방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한식골 백구만이를 아실랑가 모르겠구만이라우. 아, 오년 전에 논 폴고 밭 폴아 갖고 대처로 떠났던 요 백구만이라우. 다 날려뻔지고 빈 몸으로 돌아왔구만이라우. 맘 잡고 살아볼텡께 잘 봐주씨요잉? 인자 알아잡수겠지라우?" 아이의 아버지는 북어두름을 벅수의 목에 처억 걸쳐줬습니다. "아부지 누구한테 그렁가?" "이잉, 벅수하네란다." "벅수하네?" "거럼, 벅수하네제. 자자. 이젠 내려가자꾸나." 그들은 빈 마을을 향해 저벅거리며 언덕을 내려갔습니다. 그날 밤, 벅수는 빈 마을에 빠알간 종이등이 켜지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 황일현 <빈 마을과 벅수와 손톱달>에서 -
<빈 마을과 벅수와 손톱달>을 작가 자신이 성인동화라고 내세우지 않았음에도 필자 임의로 성인동화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 동화에 함유된 고도의 서정성을 아동들이 과연 완전소화할 수 있을까 염려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며 주제 역시 성인들이 유념해야 할 가치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위의 동화는 벅수를 의인화하였다. 벅수는 돌로 만들어진 장승을 일컫는 말이다. 마을 입구 고갯길에 서 있는 벅수는, 도시를 동경하여 모두 떠나버린 빈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동화의 초두부터 손톱달이라고 지칭한 초생달을 개입시킴으로써 농밀한 서정성이 전개된다.
작가가 이 동화에서 제기하려고 하는 주요 내용은 이농민의 문제이다. 작가는 농토를 버리고 무작정 도시로 떠났던 사람이 흙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시 돌아오게 함으로써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였다. 작가는 우리 민족 토속적 종교의 심볼 중 하나인 벅수의 시각을 통해 황폐한 농촌과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였다.
적절하게 활용한 방언도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과 조화를 이룬다. 이런 경우의 방언은 무뚝뚝한 벅수와 빈 마을, 그리고 이농민의 정서를 그리는 데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만일 이 작품에서 방언을 쓰지 않고 표준말을 깍듯이 사용하였다면 전체적인 분위기와 흐름이 어긋났을 것이다.
문학이 예술인 것은, 그것이 의미와 사상의 그릇이기 이전 그 향수 과정에서의 미적 쾌락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이 동화는 제시하고 싶은 분명한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내보이는 일에 급급하지 않았다. 정감이 흥건한 메아리와 바람, 시골 사람처럼 투박하고 정직한 벅수와 애교 있는 손톱달이 벌이는 장난스런 대화를 통해서 아름다운 향토의 정서를 만끽하게 하였다.
흔히 고발에 역점을 둘 때 격앙된 목소리가 형식미를 파괴하고 동화의 어조가 거칠어지거나 무리한 설교조가 될 수 있다. 위의 동화는 드러내고자 하는 내용을 무리없이 드러내면서 형식적 아름다움도 유지하였다. 그것은 인간의 시각이 아닌 자연의 시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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