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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화의 악역과 이야기 전개

가마실 / 설인 2011. 3. 20. 16:32

동화의 악역과 이야기 전개
    강의 진행자 : 김문기 (hipen@naver.com)  

전래 동화에서는 인물 설정이 단순하고 지극히 전형적입니다. 권선징악 사상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는 바, 주인공과 악역의 동시 설정으로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며 그에 귀결된 메시지를 내보이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중요시 여겨야 할 점은, 惡役의 역할입니다. 전래 동화에서의 악역은 곧 연극적 논리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럼, 필자가 재화한 다음의 전래 동화를 읽으며 악역의 역할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옛날 옛날이야기예요.
개똥이라는 착한 소년은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와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집안의 어른이신 할아버지가 몹쓸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어요. 하루 이틀도 아닌 몇 년씩이나요.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끝내 참지 못했어요.
“에이, 벌써 몇 년째야! 아버님 병은 못 낫는 병이야. 빨리 죽기나 해야지.”
“그러게 말이에요. 집안 꼴도 말이 아니고요. 흥! 죽기를 빌어도 안 죽으니, 나 원.”
그에 개똥이는 화가 났어요.
“그러면 안돼요. 할아버지를 더 따뜻하게 보살펴 드리고 맛있는 고기 음식을 대접해 드리면 나으실 텐데요.”
그러나 아버지는 지게를 가리키며 말했어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다. 빨리 할아버지를 지게에 져다 버려라.”
어머니도 똑같았어요.
“얘야? 빨리 먼 산 속에 갖다 버려라. 남들도 다 그런다.”
개똥이는 할 수 없이 할아버지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갔어요.
“할아버지 병은 꼭 나으실 거예요.”
“아니다. 네 아비, 어미 말이 맞다. 난 죽어야지. 흑.”
“아니에요. 할아버지. 이 나무 아래에 앉아 쉬고 계세요.”
“어디 가려고?”
개똥이는 좋은 생각이 떠올라 할아버지를 나무 아래에서 쉬게 하고 자기는 다시 지게를 지고 산을 내려왔어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를 칠봉산 범골 아주 깊은 곳에 져다 버렸어요.”
그러면서 지게를 마당에 쿵 하고 내려놓았어요.
“아니, 이 녀석아! 사람을 져다 버렸으면 지게까지 거기에 버리고 와야지. 그 더러운 지게는 왜 가지고 왔어!”
그에 개똥이는 시침을 뚝 떼고 또박또박 말했어요.
“지게를 버리다니요? 잘 간수해 둬야 나중에 아버지, 어머니 아프시면 저 지게로 산 속에 내다 버려야 하질 않아요. 안 그래요?”
그 말을 듣고 아버지,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어요.
“아버님! 저희들이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산으로 가서 할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어요.
“으흠. 효도해야지, 효도 받습니다!”
개똥이의 지혜로움에 아버지, 어머니가 크게 깨우쳤어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전래 동화, 『할아버지를 져다 버린 손자』

위 전래 동화에 그대로 악역(아버지, 어머니)의 역할이 나타나 있습니다.

  • 주인공의 좋은 점을 확연히 부각시키고 있으며
  • 주인공과 더불어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고 있고
  • 긴장을 주며 극적 요소를 만들어 내고
  • 작중 메시지를 갈고 다듬는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악역의 역할이 꼭 인물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때로는 자연적 악조건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호랑이를 비롯 동식물로 등장하기도 하고, ‘가난한 가정환경’으로도 등장하기도 합니다.

옛날 옛날 강원도 두메산골에 마음씨 착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집이 너무 가난하여 날마다 짚신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장날, 젊은이는 짚신을 내다 팔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게 웬일인가? 아무도 없는 산길에 돈이 가득 든 전대가 떨어져 있었다.

――――― 전래 동화, 『정직한 짚신 장수』

전래 동화의 도입부입니다. 여기에서 보듯 악역은 ‘돈이 가득 든 전대’로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는 동안 끊임없이 주인공의 정직함을 시험하고 물질적으로 유혹하기도 합니다.

자고로 동화를 창작할 때는 주인공과 악역을 적절하고도 효과적으로 설정해야 하는데, 대개의 전래 동화에서 보여지는 바와 같이 그 전형적 유형 즉,

  • 『콩쥐팥쥐』에서의 ‘계모’
  • 『정직한 짚신 장수』에서의 ‘돈이 많이 든 전대’
  • 『은혜 모르는 호랑이』에서의 ‘호랑이’

등의 악역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주인공과 치열한 갈등 구조를 이루게 하고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고 있습니다.

전래 동화의 특징인 그 전형적 인물 설정은 그러나 현대 산업 사회에서의 창작동화에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비판을 받게 되니까요. 多分化되고 個別化된 사회에서는 전래 동화식 인물 설정이 너무 가공적으로 여겨집니다. 아울러 그 허구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합리주의를 지향하는 현대인들에겐 여러모로 무리가 따르는 게 사실입니다.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전래 동화에서 시대 환경에 맞게 발전을 거듭하여 이제는 미적 차원으로 끌어올려진 것이 현대 창작동화입니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높습니다. 따라서 환경과 배경을 묘사하는 것에 앞서 주인공과 악역을 둘러싼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나타내는 일이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주인공과 악역과의 이야기를 통하지 않은 채 인물과 배경을 설정하는 것, 즉 서술과 설명식 전개만으로는 안 됩니다. 문학성은 차치하고라도 금방 어린이 독자의 외면을 받게 되니까요.

아래는 필자가 심사를 맡아 2005년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동화 당선작으로 뽑은 작품인데, 여기에서 주인공과 악역의 역할을 유심히 살펴보기 바랍니다.
 

깜상이와 자전거

               (박영희 / 37세 / 울산 거주/ 초등학교 교사)

“우와, 하하하…”
아이들이 또 소리를 질러대며 웃기 시작합니다. 유나는 오늘도 뜀틀을 넘지 못했습니다. 넘기는커녕 구름판 앞에서 발 한 번 구르고는 한밤중에 거울에서 제 얼굴보고 놀란 사람 마냥 우뚝 서 버렸습니다.
뜀틀뿐만이 아닙니다. 피구시합을 할 때도 폭탄이라도 피하는 양, 내내 비명을 지르는 쥐처럼 도망만 다니다가 머리에 공 한 방 맞고 찔끔찔끔 울기 일쑤입니다.
유나는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면 아침부터 걱정이 되곤 했습니다. 아니 이제는 체육시간이 없어지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난 정말 운동에는 소질이 없나봐.’
공부는 곧잘 하는 유나였지만 운동이라면 정말 자신이 없었습니다.
유나는 4학년이 되도록 자전거 타는 법도 배우지 못하였습니다.
미꾸라지 손가락 사이로 빠지듯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달리는 친구들을 보면 그 신비롭기까지 한 기술을 자기가 받은 상장 열 개와도 맞바꾸고 싶었습니다.
‘나도 한 번 저렇게 타 봤으면…….’
사실 유나가 자전거 배우기를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제대로 출발도 하기 전에 넘어지는 통에 무릎이 까지고 손바닥이 긁히기는 예사였습니다.
‘10m만 갈 수 있다면, 아니 5m만. 아니 출발만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유나의 소망은 넘어가는 해 마냥 점점 희미해져 갔고 실망의 그림자는 점차 짙어져 갔습니다. 마침내 자전거와 함께 넘어져 하얀 무릎에 실지렁이 같은 핏물이 배어 나오던 어느 날, 유나는 무언가 모를 서러움에 북받쳐 소리쳤습니다.
“나, 이제 다시는 안 해. 안 한다구!”
그리고는 반딧불처럼 빛나는 야광 장식물을 자전거 바퀴에 붙이고 바람처럼 달리고 싶은 꿈을 자전거와 함께 마당 한구석에 내동댕이치고 말았습니다.
저녁마다 근처 공원으로 운동하러 나가시는 아버지가 오늘도 유나를 구슬려 봅니다.
“유나야, 아빠가 뒤에서 잘 잡아 줄 테니 한 번만 더 해보자.”
“싫어요.”
유나는 아버지가 운동복으로 갈아입는 기미를 보이자 갑자기 소파에서 돌아누우며 소금 빠진 찌개 마냥 대답합니다.
“조금만 연습하면 탈 수 있다니까!”
“안 해요.”
“오늘 한 번만 더 해보면 될 거야.”
“…….”
유나는 깊은 잠이라도 자려는 듯 눈꺼풀을 꼭 붙이고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 유나야. 한 번만 더 시도해봐. 응?”
이제 엄마까지 거들기 시작합니다.
“싫어요, 나 안 할래요. 난 원래 운동신경이 둔해서 안 될 게 뻔해요.”
“그렇지 않다니까. 응?”
이쯤 되면 유나는 제 방에 쏙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유나는 까만 색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디딤돌 앞에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엄마! 웬 강아지예요?”
“아, 글쎄 시장 갔다 오는 길에 보니 전봇대 옆에서 낑낑거리고 있잖니? 아직 어린 녀석 같은데 누가 갖다 버린 모양이야, 쯧쯧쯧….”
유나는 연탄이, 깜깜이, 먹물떼기 등등의 이름을 놓고 고심하다가 깜상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마당 구석에 신문지를 깔아 화장실을 마련해 주었지만 깜상이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여 여기저기에 마구 실례를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엄마가 상추를 심으려고 가꾸어 놓은 작은 텃밭도 헤집고 다니기 일쑤였습니다.
“안 되겠다. 가엽기는 하지만 좀 묶어둬야겠구나.”
엄마는 1m쯤 되는 줄을 구하여 깜상이를 묶어두기로 하였습니다.
깜상이에게 밥을 주는 것은 유나의 몫이었습니다.
유나가 밥그릇을 들고 나타나기만 하면 깜상이는 두 발로 일어서며 폴짝폴짝 뛰어 올랐습니다. 유나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펄쩍 앞으로 뜀박질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목줄이 깜상이를 잡아채면서 깜상이는 유리벽에라도 부딪혀 튕겨 나간 듯이 나뒹굴었습니다.
“끼잉, 끼잉.”
그 모습을 보며 유나는 깔깔거리고 웃습니다.
“네가 아무리 뛰어봤자 소용없다구. 줄에 매여 있는 걸 몰라? 약 오르지?”
유나는 반지름 1m쯤 되는 반원을 좌우로 그려대며 숨넘어가는 소리로 재촉하는 깜상이를 놀려댑니다.
그러길 10여 일이 지났습니다. 이젠 깜상이도 밥그릇을 가지고 오는 유나의 모습을 봐도 전처럼 뛰어 오르지 않습니다. 뛰어 봤자 별 수 없다는 걸 아는 모양입니다. 엉덩짝에 붙은 먼지라도 떼어 내는 듯 그저 꼬리만 살래살래 흔들 뿐입니다.
한두 가지 동작밖에 못하는 로봇인형처럼 얌전해진 깜상이를 보니 유나는 왠지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유나의 다리를 부여잡기도 하고 뒤꿈치를 물어뜯으며 안달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사냥감을 앞에 둔 치타처럼 달려드는 모습을 보고 싶어진 유나는 깜상이의 목줄을 슬그머니 풀어 주었습니다.
“깜상아, 이리와. 누나가 쥐포 줄게.”
유나는 깜상이가 제일 좋아하는 쥐포를 깜상이 코앞에서 두어 번 흔들어 대고는 디딤돌 위에 걸터앉아 깜상이를 불렀습니다. 깜상이의 눈동자가 솥뚜껑만 하게 커졌습니다. 하지만 깜상이는 제자리에 선 채로 엉덩이만 세게 흔듭니다.
“깜상아, 이리 오라니까.”
깜상이는 두 발로 일어서며 허공을 허우적대기만 합니다. 마치 누가 뒤에서 잡아당기기라도 하는 듯 한 발짝도 앞으로 나서지 못합니다.
“먹고 싶으면 빨리 이쪽으로 오라니깐. 줄이 안 매여 있단 말이야!”
유나의 목소리가 커져갑니다.
깜상이가 낑낑대는 소리도 점점 커져갑니다.
“아유, 바보 같은 것! 줄도 안 매여 있는데, 한 발짝만 떼면 되는데. 한 발짝만 떼어보라니깐!”
마침내 유나는 고함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한 번만 해봐! 한 발짝만 떼어 보라구! 한 번만!”
그런데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치던 유나의 눈에 무엇인가가 언뜻 비쳤습니다. 마당 구석에 세워 둔 자전거였습니다. 여전히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허공만 긁어대는 깜상이의 모습 뒤로 그토록 폼 나게 달려 보고 싶었던 자전거가 잠자듯이 벽에 기대 서 있었습니다.
유나는 잠시 멍한 듯 앉아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전거 핸들을 부여잡았습니다.
“엄마! 나 자전거 타러 가요. 자전거 타는 법 배워 올거라구요! 오늘은 꼭 타고 만다구요!”
유나는 무어라 외치는 엄마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부리나케 대문을 나섰습니다.
그제서야 깜상이도 유나를 따라 뛰쳐나갔습니다.


위 동화에서의 흠이라면 이야기 진행이 매끄럽지 않고 문장이 조금 거칠다는 것이고, 맨 마지막에 자전거를 타고 집밖으로 나가려는 주인공 유나의 행동이 돌출적이라는 점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집밖으로 나가려는 특별한 이유를 앞 부분에서 살짝 임시해 주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반면에, 장점이 많습니다.

  • 작가가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어린이 문제를 고민하는 자세가 가상해 보였습니다.
  • 주인공이 수다스러운 공주형이 아니라 희망을 못 이루고 매번 좌절해야 하는 그 사실주의적 모습으로 설정한 것이 좋았습니다.
  • 복선과 상징을 깐 것이 좋았습니다. 처음 부분에 주인공 유나가 운동을 통 못하여 고민을 많이 하고 자전거조차 못 타는 관계로 울기까지 하다가 모든 걸 체념하는데, 그런 다음 보니, 자기 집 식구가 된 강아지 깜상이 역시 1미터 줄에 매여있어서 차츰 야성을 잃어버리고 그 1미터 안에서만 맴돌다가 스스로 포기하고 체념해버립니다. 그러다 나중에 가면 주인공 유나가 개줄을 풀어놓고 깜상이에게 이리 오라고 해도 못 옵니다. 맛있는 쥐포를 흔들어대며 불러도 자기 체념에 빠진 깜상이는 반지름 1미터 안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 유나가 (돌출적이긴 하나)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가려하자 깜상이가 뒤쫒아나갔습니다. 즉, 자기 체념을 떨쳐버리고 자전거와 함께 새롭고도 가슴 벅한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모습입니다.
  •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관념적인 고민이나 교훈을 주려는 글귀는 찾아볼 수 없고 줄곧 작가로서 자기 감정을 자제하며 냉정하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악역은 무엇일까요? 주인공 유나가 운동을 통 못하여 고민을 많이 하고 자전거조차 못 타는 관계로 울기까지 하다가 모든 걸 체념하는 심리 상태가 바로 ‘악역’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내내 이 악역과의 싸움(운동을 못 하여 체념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고 주인공 유나가 결국 악역을 극복해 나갑니다.

이야기는 우선 재미있어야 하고 즐거움을 안겨주는 것이라야 합니다. 즐거움은 문학의 본질적인 사항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즐거움이란, 이야기에 있어 다음에 또 어떤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서스펜스와 스릴만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한 요건이긴 합니다. 동화는 재미있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린이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악역의 대결을 맞보게 하고 그들과 더불어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의 새로운 체험을 맛보게 하는 일입니다. 그런 식으로 동화 속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할 때 보다 차원 높은 즐거움이 생겨나니까요.

 

출처 : 박종국 수필가의 일상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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