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들려주는 원시림 이야기
성갑숙
하이고야~
그 시절에 가시나로 태어난 건
죄가 있을 거로 아마
땅 위에 가시나 없어지면
사람 씨가 마른다 해도
가시나라는 말 진저리야
골용석에 손 귀한 학자 집안
태중에서부터 남아 이름 지어놓고
학수고대 기다렸으니 내 이름이 외돌이다
생부는 손 끈긴 종가집에 첫 소생을 주기로 약속했으니
나는 양딸로 큰집에 가 살면서 소학교에도 가니라
선생은 조선사람인데 일본말을 가르쳐
생부가 한사코 마다하더라
가시나는 살림만 잘하면 된다고
학교를 막살하고
명 따서 물레 잣고 꽃수 놓아 이불 만들고
양달용석 앞 갯둑으로 응달용석 앞 논둑으로 나물 뜯어
밥상 차리다 열여덟 혼인기를 맞았다
십리 밖 가마실이라
자손 많은 창녕성씨 집안과 혼약을 맺고
맏며느리라 대우받고 살거라고
가마 타고 하님 데리고 신행을 가는데
신랑은 일본으로 징용 끌려가고 없다 안 카나
신랑도 없는 시집살이
내리내리 시동생들은 한창 먹성 좋을 때
하루 종일 텃밭에 엎드려 푸성귀 뜯어내느라
허리가 휘는데도 어쩐지 싫지는 않더라
휴우~
시집살이 3년 만에 해방을 맞아
이제나 저제나 신랑 오기 학수고대
소문이 들리기로
일본에서 새각시를 얻었을 성 싶다고
너거 할매가 난색을 하시더라
고마 안 오도 된다 싶더라
그곳이 살기 좋으마 그냥 거기 살아야지
숭악한 놈들이 들이쳐
좋은 거 다 뺏어간 동네에 와서 생고생할게 뭐고
지라도 잘 묵고 잘 살아야지
휴우~
그러다가 우짜다가
동무 손에 끌리어 돌아온 신랑이 무슨 정이 있겠노
그냥 엎어지고 자빠지고 땅 파는 기 잴 속 편하지
나는 다시 태어나면 너거 아부지하고 안 살지
남자는 얼고 녹고 남 앞에서 말 잘하고 대범해야지
여자 맹키로 정 많고 눈물 많고
그러니 일본 가시나한테 잡힌 거 아니가
내 질투 나서 그런 기 아니다
그래도 어른들 눈치가 보이더라
맏손자를 보고 싶은 거 아니겠나
어느 날부턴가
삽짝문 밖 살구나무가 자꾸 올려다 보여
너거 할배가 몇해 전에 심어 논 나무 중에
제일 먼저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하더니
그 해는 손톱만한 열매가 제법 달렸다고
날마다 치어다 보고는
손가락을 폈다 오그렸다 하시는데
내가 그만 일을 냈다
이른 새벽 희끄무레 날이 밝는데
정지에 앉아 기밍물을 끓이다 말고
갑자기 시퍼런 풋살구가 어찌나 먹고 싶던지
사랑채 앞을 몇 번을 서성여도 기척이 없더라
삽짝을 열고 나가
손 잡히는 대로 두어 줄기 내리 훑어
살강 밑에 숨겨두고 몇 알 씹어댔다
참 이상하게도 눈도 안 찡그러지더라
날이 밝자 들에 나가시던 사랑채 어른이
숭악한 놈들이 있다고
살구나무 아래서 노발대발하시는데
너거 할매가 조용히 나가서 입을 막으셨다
그래서 나온 것이 가시나다 가시나
아이고야~
그뿐인가
육이오 전쟁 통에 집 두고 청도로 피난을 갔다
남의 집 헛간에서 칠흑 같은 밤을 지새는데 배가 아파와
낙동강이 무너진다고 멀리서 대포소리는 귀청을 찢고
엉겁결에 용 한번 쓴 것도 가시나
일주일 만에 인민군이 도망을 갔다고
가마실로 돌아오는데 태산같은 천황재를 넘어야 했다
온 식구가 짐을 져야하니
나는 작은 핏덩이를 싸서 등에 업고 산을 오르는데
몸이 천근이라 아이고 죽는구나 싶더라
고무신이 자꾸 벗겨져서 내려다보니 피가 한 신이라
너거 할배가 그 모습을 보고 한탄을 하니라
이노무 세상이 사람을 잡네 이러다 사람 죽이겠다
지겟짐을 내려놓고 내 등에 핏덩이를 달라시는데
내리다가 고마 똘똘 뭉쳐 산중에 버려놓고 오고 싶더라
정월달을 맞아 큰집 작은집 세배를 가야했다
몸이 나서 이도 저도 못하고
사랑채는 며칠째 기반 손들이 들락날락하는데 배가 아파
너거 할매 손사레를 치며 바깥마당에다 소리하셨다
세배도 이제 그만 받으라고
죽을 판 살판 방구석을 헤매다가 우째 우째 몸을 풀었는데
수발하던 어른이 말이 없다
물 끓인다고 어른이 나가시는데 어찌나 성이 나던지
정초에 아구지 쳐 벌린 것이 가시나라니
나는 모진 맘을 먹었단다
숨소리도 아니 들리는 핏덩이 얼굴에 이불을 푸욱 덮었니라
눈 딱 감고 아랫목에 밀어놓고
미역국 받아먹기도 민망해서 몸을 추스르는데
너거 할매가 들어오셨다
아이를 찾아 둘레둘레 살피시는데
아랫목에서 새액새액 꺼져가는 울음소리가 들리더라
대번에 벼락을 치셨지
네가 낳았다고 네 맘대로 하나
뉘집 핏줄인데
천벌을 받을라 카나
그래서 건진 것도 가시나
그기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가시나다
휴우~
인자는 머시마 팔아 묵은 이야기 하꾸마
나중에는 집 뒤 강냉이 밭으로 숨어들었다
유월이라 여름비가 추적추적 오는데
키를 넘는 대궁은 남산만한 배를 감추기에 충분했다
강냉이 씨알은 튼실튼실 불거져
어깨죽지를 툭툭 쳐도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어디서 났는지 손에는 가마떼기가 들려있고
축축한 고랑에 그걸 깔고 무릎을 꿇었다
우짤뻔 했노 그 때 너거 할매 나타나지 않으셨다면
우리 집안 귀한 자손 강냉이 밭에 묻을 뻔 안 했나
짬짬하고 말수 적은 너거 할배
을매나 좋아하시던지
무논에 일하다 통기 듣고 달려와서
가름 옷 비라 입고 영산읍내 장으로 달려 나가시는데
비호가 따로 없지
대각 사고 고기 사고 바지게 가득 지고 와서
정지 앞에 내려놓으니 온 집안에 미역국 냄새라
죽은 영장도 꿈질댄다는 농번기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있어도 을매나 번듭던지
그래서 머시마를 낳아야 되는거라
그래 얻은 머시마가 밤이면 밤마다 경기를 하는데
온 식구가 애가 타서 사는기 아니라
굿을 하다
절에 올리다
돌에 팔다
서낭당에 치성을 드리다
읍내 유명한 점쟁이가 있다해서 머시마를 팔았다
금쪽같은 머시마가 그 무당을 보고 엄마라고 부르는데
한쪽으로 밀려난 그 기분 내 팔자가 와 이렇노
눈치 빠른 너거 할매 내를 달래시는데
못이긴 척 봐주었다만 어찌 얻은 머시마고
휴우~
그러구러 세월이 가고
그 밑에 또 가시나만 낳았다
나는 언제나 처럼 가시나는 낳아 주기만 했다
머시마 위로도 그 아래도 가시나는 전부
할배가 업어 키우고 할매가 품어 키웠다
어른들 앞에서 나는 보듬어주지도 칭찬한 적도 없다
칭칭시하 넉넉잖은 집안에
키워보았자 남 줄 쓰잘데없는 입 늘인 죄
너무 커서 번듭지 못했는지
일손이 바빴던지 모르겠다만
가시나는 내리내리 일만 시켰다
내 시집와서 시동생 서이 살림 내 주고
꼬장꼬장한 시매 출가 시키고
그러고 나니 내 낳은 가시나들 혼기 닥치는데
눈코 뜰새나 있었나
삼베 삼고 모시 삼고 명 잣아 고운 피륙
온 동네 어른들 수의 지어 치사 받고
가마실 동네 일어나는 대소사에
내가 없으면 안 될 정도로 불려 다니느라 바쁠 때
내 가시나들은 살림살이 바느질 들일까지
쉼 없이 내 할일을 처리했다
가시나들 공부는 기본만 하면 되지
지 잘나서 지 머리 좋아 공부 더 하겠다해도
나는 대처로 내 보낼 맘 없었다
여자와 그릇은 내돌리면 깨진다고 안했나
그런데 가시나들이 재주가 좋은 걸 우짜노
그림 잘 그린다는 가시나를 대처로 보내
대학을 보내야 한다고 하니 말이 되나
가시나가 무슨 그림이고
그림을 그릴라면 돈도 턱없이 많이 든다는데
말도 못 꺼내게 했다
그런데 참 얄구지라
학교 미술선생이라고 자그마한 사람이 찾아왔더라
그 미술선생 여자인데도 참 야무진기라
그림쟁이 쓰는 물건은 전부 지가 대 줄 테니
가시나를 미대에 꼭 보내야 한다네
그냥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고 참 야무진기라
여자도 공부를 하면 그래 야무지다는 거
그때야 알았다 아이가
그래 가시나들이 공부해서
화가 되고
서예가 되고
시인도 되고 하는 지금
내 나이 팔십 하고도 여섯 살이다
하이고야~
나는 내 가시나들한테 쪼매치도 안 미안타
하나 있는 머시마에 비해 함부로 키웠다고 절대로 안 미안타
내 낳은 가시나들 아프리카 사막에나
시베리아 벌판에 갔다 놔 봐라 굶어 죽는가
모래밭에 나무 심어 그늘 만들고
태산 같은 빙산 녹여 강줄기 따라 옥토 만들거로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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