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래동화)
세상을 정복할 장수와 용마이야기
글/ 성갑숙
옛날 조선시대 때, 창녕 가마실에는 백씨 일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습니다. 마을을 에워
싼 야트막한 산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맑은 물을 가마실 동네로 내려 보내주었고요. 마을
앞 들판에는 해마다 풍년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어느 해도 따뜻한 봄을 맞아 마을 앞 들판에는 가마실 사람들이 모내기 하느라 눈코 뜰 사이 없이 바빴습니다. 마침 삿갓을 쓴 도사님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그 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어허!”
도사님은 발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주욱 펴고는 가마실 뒷산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한참을 꿈쩍 않고 서 있던 도사님은 아예 괴나리봇짐을 근처 논두렁 가에 내려놓고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 모습을 발견한 것은 새참을 먹기 위해 논두렁으로 걸어 나온 농부 백씨였습니다.
“도사님, 볕이 뜨겁습니다. 목이나 축이고 가시지요?”
“어허! 풍수지리가 좋으니 인심도 좋구려.”
어딘지 보통사람과 달라 보이는 차림에 백씨는‘도사님, 도사님’하면서 농주를 가득 부어 주거니 받거니 나눠 마셨습니다. 얼큰한 농주 몇 모금에 목을 축이면서 도사님은 계속 마을 뒤쪽 산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리고는 가던 길도 잃어버린 듯 마냥 주저앉아 중얼거렸습니다.
“어허, 저 산의 맥을 보니 심상찮은데…….”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백씨가 보릿짚 모자를 벗어 모춤 위에 올려두고 도사님 눈길 따라 뒷산을 올려다보았습니다. 항상 보던 뒷산을 물끄러미 보다가 궁금하여 물었습니다.
“도사님, 저 뒷산에는 큰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요. 예부터 그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일컬어왔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요?”
도사님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말했습니다.
“저 뒷산 생김새로 보아서는 이 마을에 큰 인물이 나겠소.”
“예엣!”
“쉿! 누가 들을까싶으이.”
“도사님, 큰 인물이라면……?”
“어허! 이 사람 목소리 낮추게. 산등에 큰 바위가 있다? 그렇다면 저 산맥의 흐름으로 보아 용마가 태어날 산이로고. 귀한 분을 태우고 다닐 용마가…….”
“그럼 경사스러운 일 아닙니까요?”
“장수가 세운 이 나라에 세상을 정복할 새로운 장수가 태어난다면?”
도사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습니다. 조선은 이성계 장군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도사님, 그럼 세상이 바뀌나요?”
“어허! 내가 또 실없는 말을 했구만. 지금 궁궐에는 어진 왕이 계시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저기서 새 왕이 나오면 어찌되겠는가?”
백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면 그렇지 하는 눈치입니다.
“내 오늘, 술 몇 모금 적시고 가면서 보답하는 뜻에서 한마디만 해 줌세. 혹시 자네 집안에 무슨 괴이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야 할 것이야.”
“괴이한 일이라니요? 도사님, 앞뒤 이야기를 좀 자세히 해 주고 가시지요?”
“어허! 어허! 저 산이 아무래도 일을 내겠구먼. 저 산이…….”
도사님은 지팡이를 툭툭 털어 짚고 일어서더니, 삿갓을 푹 눌러 쓰고는 바람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바다 건너 왜적들이 평화롭던 조선땅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단숨에 도성까지 들이 친 왜적들은 가마실에도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가마실 뒷산 성지산 장군등에 장군바위는 큰 장수가 날 것이라 염려하여 왜적대장이 그 바위를 끊어버리고 갔습니다. 그러자 석 달 열흘 천둥번개가 치면서 성지산맥을 따라 핏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가마실사람들은 천지가 무너지려나 걱정하며 집안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다시는 봄을 맞을 수 없을 것 같은 가마실 들판으로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 것은 그 이듬해였습니다. 남해안으로 도적 때들이 사라지고 따뜻한 바람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가마실 들판에서 열심히 봄갈이 하는 백씨의 얼굴에는 여느 해와 달리 웃음꽃이 만발했습니다. 혼인 후 수년 동안 태기가 없던 부인이 입덧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가마실 돌담을 넘어 울려 퍼진 아기 울음소리는 우렁찼습니다.
“아들이야! 아들!”
백씨집안에 아들이 태어나자 온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습니다. 대문 앞에는 금줄이 드리워지고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엮였습니다. 이웃의 사촌도 팔촌도 대문 앞에 달려와서 귀한 자손이 태어남을 축하하며 금줄이 걷혀질 날을 기다렸습니다. 금줄은 갓 태어난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것인데 친척들은 얼른 삼칠일이 지나서 귀하디귀한 자손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담장을 넘는 우렁찬 아기울음소리로 보아 분명 나라에 큰일을 할 인물이 태어났다며 온 마을 사람들은 기대를 모았습니다.
다음날 백씨부인은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푸근히 잠이 들었습니다. 아기를 낳느라 기력이 떨어진 부인이 잠든 지 한 시간이나 흘렀을까요?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눈을 슬며시 떴습니다.
“헉!”
방안을 휘돌아보고 다시 잠을 청하려던 백씨부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곁에 뉘어둔 아기가 사라졌습니다. 혹시 그 사이 사랑채어른들께서 보고 싶어 데려갔나 하고 힘없이 방바닥에 몸을 다시 누이고 천정을 올려보던 백씨부인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악!”
잠시 정신 줄을 놓았다 깨어난 백씨부인은 아기를 낳느라 기운이 빠져 헛것을 보았나 싶어 눈을 닦고 다시 천정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아가!”
백씨부인의 외마디소리에 방문 밖이 술렁댔습니다. 무슨 일인가. 집안 식구들이 방 문고리를 잡아채는데 천정에 붙어있던 아기가 눈 깜짝할 새 내려와 강보에 싸여 죽은 듯이 잠을 자는 것입니다. 놀라서 뛰어 들어온 백씨가 잠든 아기와 부인을 번갈아 내려다보더니
“어허! 그 녀석 하루사이 몰라보게 컸구만. 이마가 훤하니 황금빛이 도는구나. 부인이 이 황금빛에 놀라 소리를 질렀소? 허허허.”
놀란 토끼눈을 한 부인에게 백씨는 그냥 푹 쉬라고만 하고 방문를 닫고 나갔습니다.
아기를 낳은 후 기운을 차려야할 백씨부인은 날이 갈수록 야위어갔습니다. 집안 어른들께 말 못할 고민만 더 쌓여갔습니다. 아기는 보통 아기들과 너무도 다르게 자랐습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 되는 날은 아예 일어서서 방 안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백씨부인은 방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백씨가 부인의 밥을 차려들고 들어오려면 밥을 밖에 그냥 두라고 하기에 식구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산고가 심했구려. 밥맛이 떨어진 걸 보니…….”
하루는 백씨가 부인을 위로하고 있는데 부인이 훌쩍이며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낳은 지 칠일밖에 안 된 아기가 방안을 걸어다니는 것이며, 수시로 천장에 붙어있기도 하는 것을요. 그 보다 더 엄청난 사실은 도저히 말할 수 없다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끙끙 앓아누웠습니다. 백씨는 사랑채에 집안 어른들을 모아놓고 의논을 했습니다.
“도무지 어린 아이라고 할 수없는 기이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 일을 자랑해야 할지. 염려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 일은 영특한 아이들에게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했을 것입니다. 백씨아들의 또 다른 기이한 행동을 털어놓기 전에는요. 다 죽게 된 백씨부인이 가까스로 비밀을 털어놓는데 온 집안 어른들이 기절초풍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은 절대 입 밖으로 내어서도 안 되고, 집밖으로 내보내어서도 안 되네. 큰 화를 당하겠구나. 큰일이다. 큰일이야.”
집안 어른들이 밤마다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을 거듭했습니다. 그리고 백씨는 수년 전 일을 떠올리고는 몸을 떨었습니다.
‘아! 그때 지나가던 도사님이 던져주던 말이 사실이구나. 그분이 또 말씀하셨지. 혹시 집안에 무슨 변고가 생기면 망서림없이 일을 처리해야 된다고……망서림없이…….?’
백씨는 하루하루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이부자리에 싸인 아기는 눈을 맞추고 방긋방긋 웃는데요. 백씨는 눈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아기가 더 자라기 전에 힘을 더 쓰기 전에…….”
도사님 말을 떠올리며 농부는 몸서리쳤습니다. 손꼽아 기다리던 귀한 자식인데 모진 결정을 내려야 한다니.
몇날 며칠 사랑채에서 백씨 집안어른들이 의논을 거듭할 때 백씨부인은 따뜻한 물을 떠다놓고 아기 손을 씻기고 또 씻기고 있었습니다.
“아가, 손을 씻어야 한다. 네 손에 있는 이 글자를 지우지 못하면 우리 집안은 멸문을 당할 거야.”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주먹을 쥐고 있었는데 목욕을 시키던 백씨부인이 억지로 펼쳐보고는 놀라 뒤로 자빠졌습니다. 손바닥에는 임금 王자가 점점이 박혀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즈음 도성은 왜란과 내분을 거듭했고 세자 책봉문제로 피바람이 일고 있었습니다. 백씨 집안사람들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듯했습니다. 이럴 때 잘못하면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연일 집안 어른들이 모여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어느 날, 지칠대로 지친 백씨부인은 모처럼 곤히 한잠을 자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아기가 없어졌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해도 문고리가 밖에서 잠겨있었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백씨부인은 소리도 크게 못 지르고 그 자리서 기절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조용히 방문이 열리고 눈자위가 붉은 백씨가 들어와 쓰러졌습니다. 한참 후 정신을 먼저 차린 백씨가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부인, 미안하오, 미안하오. 흐흑!”
“아닙니다. 특별한 아기를 낳은 제가 미안합니다. 흐흐흑!”
“우리 아기의 기운이 얼마나 센지. 동네에서 가장 무거운 다듬이돌을 준비해야 했오. 내 죄가 크오. 내 죄가.”
다듬이돌에 눌려 아기의 숨이 끊어진 날 밤, 백씨부부는 잠자리에 들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데 하늘에서 난데없는 천둥번개가 치기 시작했습니다. 온 마을이 대낮같이 밝으니 마을사람들까지 두려움에 덜덜 떨었습니다.
다음날, 가마실 사람들은 뒷산 성지산 장군등을 올려다보며 웅성댔습니다.
“백마다. 백마!”
희디 흰 날개를 펄럭이며 백마가 이산 저산으로 미친듯이 날아다니면서 애절하게 울어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하늘이 노하겠다며 두려워하는데 백씨는 도사님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이 마을 근동은 세상을 정복할 장수가 태어날 형상이오. 뒷산 성지산 장군등에서는 그 장수를 태울 어마어마하게 큰 백마가 태어날 형상이니 이 주변마을은 모두 그 장수를 맞이할 땅이라오.
저 아래 큰 동네가 진창(陣倉)인 것은 장수가 태어나면 군사들이 진을 치고 군량미를 쌓아둘 창고이요. 백마는 날개를 달고 날아다닐 것이며, 얼마나 클지 짐작을 하지못하겠오. 사방 마을의 지명으로 보아 짐작하건데, 말머리를 둘 마수원(馬首阮)과. 큰 말굽이 박힐 거마제(巨馬蹄)며, 말구유를 둘 곳은 풍조(風槽), 이 가마실이 가마솥 모양인 것은 말죽을 끓일 솥을 걸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오. 그러나 천운이 닿지 못하면 백마가 울다 지쳐 쓰러질 것이니 예를 다하여 장례를 치루어야 할 것이요.”
사나흘 후, 애절하던 말 울음소리가 잦아들었습니다. 성지산이 아니라 그 아래 토옥골에서 잦아들었으니 마을 사람들은 백씨를 따라 저마다 손에 삽과 지게를 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토옥골짝을 오르던 마을사람들은 약샘을 지나 등산 골짜기로 접어들면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간 백마는 지상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큰 산만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옮기려 해도 옮길 수 없으니 백마가 쓰러진 그 자리에 그대로 묻어주었습니다. 무덤이 논두렁 아홉필지나 되었으니 하늘의 운이 닿지않음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런 일이 있는 후, 훌륭한 장수를 키워내지 못한 백씨집안은 날이 갈수록 살기가 힘들어져 뿔뿔이 흩어지고 훗날 새로운 성씨가 가마실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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