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창작론 ⑥
비유의 정체와 기능
―비유를 모르면 시를 못 쓰는가?
유 경 환
'비유컨대, 한용운의 시에서 님은 무엇입니까?'라고 말한다. 비유라는 낱말이 문장에 등장한 경우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김동명의 시에서는 호수가 마음의 비유임을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성서는 비유로 가득 차 있다. '하느님의 어린 양'의 양, '나의 목자시니'의 목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의 포도나무는 모두 비유이다. 불교의 법구경도 비유로 말한 경구들의 모음이다.
윌리암 워드워즈는 무지개를 이상에 비유했다. '용비어천가'의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비유의 시다. 월인천강은 '1천 개의 강줄기에 달이 빠져 있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1천 개의 강줄기는 수많은 강의 과장 표현이다. '임금이 어질면 그 은총이 어디에나 고루 퍼진다.' 이런 해석이 위의 한자 넉 자에서 나올 수 있다. 달은 군주의 비유로 쓰였다.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라는 강소천의 '닭'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이상을 쳐다보는 인생을 비유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병아리떼 종종종'의 병아리도 귀여운 어린이의 비유일 수 있다.
자, 이 정도의 예문을 읽어보면 비유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어떤 관념이나 사물을 그와 비슷한 것을 끌어대어 설명하는 일'이 사전적 비유의 뜻이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 정의를 읽으면 알 듯한 뜻이 더 알쏭달쏭하게 안개 속에 숨겨진다.
비유란 쉬운 말로 빗대어 하는 말이다. 빗댄다는 말이 흔히 나쁜 뜻으로 쓰이기 때문에 개념의 혼란을 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빗댄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서는 이미지를 끌어오기 위해 빗댄다고 여기면 된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설명하는, 간접적 묘사의 방법이라고 받아들이면 비유의 개념은 단순해진다.
그러면 왜 다른 사물이 지니고 있는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려는 방법을 쓰는가? 비유의 방법을 쓰면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 줄 수 있다. 독자에게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일몫이 바로 비유의 기능인 까닭이다.
독자는 독자 나름으로 제각기 체험(내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독자 체험과 쉽게 연결시켜주는 일몫이 비유의 효과에 들어 있다. 그래서 비유의 기법은 독자의 체험과 서로 관계가 있는 상관 관계라고 말한다.
강소천의 작품 '닭'에서 닭을 그냥 마당가에 이리저리 다니는 닭으로 읽는 독자는 어린 독자이고, 닭 이상의 것으로 읽는 독자는 그만큼 성숙한 독자이다. 한 군주가 어질면 만 백성이 편하게 산다는 해석을 하는 이는, 월인천강의 달을 임금으로 해석하는 사람이다.
비유의 기법을 써서 다른 사물의 이미지를 끌어다 간접적으로 설명하면 그만큼 해석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에, 다양한 체험을 지닌 폭 넓은 독자층에겐 전달 의지가 쉽게 수용될 수 있다. 독자는, 성숙한 독자일수록 다양한 체험을 축적하고 있으므로, 그만큼 해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이 점이 바로 비유와 체험 사이를 말하는 상관 관계의 참뜻인 것이다.
비유는 영어로 메타포어(metaphor)이다. 비유는 직유(直喩)와 은유(隱喩)로 갈라볼 수 있다. 직유는 한자 그대로 직접적인 비유를, 은유는 한자 글자대로 은근한 비유를 가리킨다. 시에서는 직유보다 은유가 더 쓰인다. 영어에서 a heart of stone 이라고 쓰면 비유가 되는데, a heart like stone 으로 쓰면 직유가 된다. 직유의 예문으로 꿀벌처럼 부지런하다를 as busy as a bee 라고 쓰면 꿀벌은 직유인 것이다. 비유의 개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영문으로 예문을 들었지만 이것까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에서 영어를 공부할 때 한번씩 짚고 넘어갔던 것이기에, 비유가 문장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확실하게 밝혀보기 위해 재인용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비유를 시 쓰는 작업에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어 이야기를 더 나누어 보기로 하자. '이런 비유를 왜 알아야 하는가'로 줄여서 말할 수도 있다. 몰라도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서를 하다보면, 한두 권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다량의 책을 읽다보면, 문장의 파악에서 저절로 비유의 일몫을 일깨우게 된다. 문법상 비유의 기능은 해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다. a heart of stone 이라고 할 때에, '돌 속에 들어 있는 마음'으로 읽는 이는 아주 적을 것이다. 돌 같은 마음(a heart like stone)으로 읽고 감상할 것이다. 그러나 문장으로서는 a heart of stone 이 더 멋지다. 왜 더 멋질까? 비유가 시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시적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데 비유를 모르면, 낱말의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것밖에 전달하지 못한다. 뒤집어 말하면, 비유가 없는 문장에선 사전적 의미 이상의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기에 비유가 시에서는 중요한 시적 요소가 된다.
한 문장에서 또는 글에서 사전적 의미에 한정된 감상밖에 할 수 없다면 얼마나 삭막한 문장이 되겠는가. 뼈가시만 남은 물고기를 뱃전에 잡아매고 돌아온 헤밍웨이의 소설 '바다와 노인'의 그 '앙상한' 해석만 가능할 것이 아닌가. 이쯤에서 비유의 개념과 기능을 더 분명하게 짚어보자. 비유는, '시에 함축된 의미를 독자의 체험만큼 확대시켜주는 효소'라고 할 만하다. 시어로 동원된 언어의 뜻을 기량껏 더 깊고 더 높게 확대시키는 마술적 기능을 비유가 한다. '기량껏'이라는 것은 독자가 지닌 '체험의 질(質)과 수준에 따라서'라는 말이다. 언어의 요술사가 바로 이 비유인 것이다.
복사꽃이 이울게 되어 바람에 날릴 때, 시인이 '꽃비'가 온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꽃잎이 눈 내리는 것보다 더 자욱하게 날리는 것을 보지 못한 독자는 (이런 체험의 결여 때문에) '꽃비'라는 비유에 선뜻 다가서지 못한다.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는 독자는, '꽃비'라는 비유를 바로 받아들이게 된다. 비처럼 꽃잎이 내리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체험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내면적으로 생각해 본 독자는, 1차 비유인 꽃잎을 넘어서 2차 비유로 '목숨이 진 낙화'로 '꽃비'를 확대 해석한다.
이렇듯, 시어의 함의(함축된 의미)를 한 겹만이 아닌 두 겹 세 겹까지 벗겨내는 해석, 이것을 가능하도록 해주는 기능이 비유의 숨겨진 기능인 셈이다.
사람이 그 주변 분위기나 환경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비유는 시를 이루는 글의 옷을 맞춰 입히는 일몫을 한다. '가을이 오자 나무도 나뭇잎을 떨군다"는 글은 산문이고, '노란 빨간 옷 / 벗는 나무'의 두 마디는 운문이다. 같은 독자가 위의 산문과 운문을 읽었을 때,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게 하는 글은 어떤 것인가. 뒤의 것이다.
사막에선 / 바람이/ 줄무늬 만들고 //
가슴에선 / 그리움이 / 줄무늬 만든다.//
그리운 이름 하나 / 가슴에 묻고 / 살지 않으면 /
어이 가슴에 / 줄무늬 일겠는가.// (졸작 '사막' 전문)
이 시에서는 사막도 줄무늬도 모두 비유다. 내셔날 지오그래픽 쏘사이어티가 보여주는 사막의 필름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 장면의 모래줄무늬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어 모래사막을 자신의 가슴으로 바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위의 필름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이야기는 아예 달라진다.)
사막을 자신의 가슴에다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리움 때문에 가슴앓이를 해 본 사람이다. 그리움, 이 때문에 잠을 제 때에 제대로 잘 수 없을 만큼 속앓이를 해 본 사람만이 사막의 줄무늬와 자신의 내면에 그어진 줄무늬를 연결시킬 수 있다. 가슴앓이라는 체험이 이 시에 구사된 비유를 직감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므로 비유는 '체험을 매개로 하여 기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윤석중이 자신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자선한 동시 '꽃밭'은 아기가 넘어져 한참 울다가 보니 정강이에 피가 아니고 꽃잎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윤석중은 새빨간 피와 새빨간 꽃잎을 비유로 쓰지 않았다. '새빨간 피가 아닌 것을 자세히 보니 알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니 피와 꽃잎은 몇 번을 읽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피와 꽃잎일 뿐이다. 절대로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될 수 없다. 시 '꽃밭'이라는 동시의 감상은 이렇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만약 '피가 아닌 꽃잎'이라는 설명을 시 속에 넣지 않고 생략했더라면, 감상의 폭은 더 넓게 확대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비유가 시의 함의와 그 해석을 확대시킴으로써 시의 멋과 격(格)을 더 돋보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지난 날, '동시에도 비유를 쓸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을 때엔, 동시 창작에 비유가 거론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시를 '어린이가 읽을 만한 시'로 수용하는 오늘날에는, 비유에 대한 공부가 당연히 있어야 하겠다. 다만 유치원 원아들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읽을 만한 동시 창작에는, 비유의 활용과 기법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다. 실정법상 미성년자는 모두 어린이이면서 아울러 청소년이다. 이 애매한 지칭 때문에 '어린이'라는 말의 개념 범주가 넓어졌다 좁아졌다 하고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우린…… 동시는 유치해서 안 읽어요'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현실에서, 동시를 계속 유치원 원아나 초등학교 저학년 계층에 걸맞도록 창작할 것인지, 더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나라 현재의 동시는,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의 접근을 막거나 배척하는 그런 수준의 동시인 것이 분명하다. 어린이나 청소년에게 읽힐 것을 바라며 동시를 쓰는 시인들은, 심각하게 들어야 하고 냉철하게 검토해야 할 과제이다.
유아 동시 유년 동시에서 어린이에게 읽힐 만한 시로 위상을 바꾸려면, 동시 창작에서 비유의 기법을 충분히 활용하는데 적극적일 필요가 있다. 비유는 시의 발효를 돕는 효소, 꼭 있어야 할 효소이다.
(2004년 여름 『한국동시문학』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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