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곳 농장 수박밭에는 개구쟁이 엉덩이만한 수박들이 엎디어 있어요.
덩이랑 동이랑 그리고 짱이 삼형제입니다.
칠월 한 낮 땡볕이 무척 뜨거웠어요.
어디서 비 소식 없나 두리번거리던 덩이가 말했어요.
“아우~ 속 타! 속이 벌겋게 타 들어 가!”
초록 엉덩이에 까만 줄이 제법 짙어진 동이가 덩이를 진정시킵니다.
“얘! 얘! 고함지르면 목이 더 타는 거야. 기다려야지.”
일찌감치 농부의 눈에 띄어 사랑을 독차지 한 덩이와 동이는 밭두둑 높이 받침대에 올려져 있으니 햇볕이 더욱 따가울 수밖에요.
오늘도 바쁜 농부는 수박밭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습니다.
“지난밤에 별일 없었니? 많이 컸구나.”
덩이와 동이는 얼른 대답을 하지요.
“네! 밤새 고라니가 다녀가긴 했지만요. 밟히지 않았어요.”
동이가 잘난 체를 합니다.
“속이 타요. 속이 타!”
덩이 말은 짜증 제대로입니다.
바쁜 농부는 덩이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는 고추밭으로 곧장 넘어 갔어요.
“비 오기 전에 익은 고추를 어서 따야한단다.”
동이는 귀가 번쩍 뜨였어요.
“덩이야, 들었지? 농부가 서두는 걸 보니 곧 비가 올 모양이다. 조금만 참 아.”
“체, 누가 목이 탄다고 했어? 속이 탄다고 했지.”
“그게 그것 아니야?”
“서툰 농부 때문에 속이 탄다고!”
“뭐라구?”
“내 속이 익어서 타는지, 목이 말라 타는지 구분을 못하잖아.”
계속 툴툴대는 덩이를 보고, 고추밭 여기저기서 수군대기 시작했어요.
“저기 덩치 큰 수박 말이야. 분수를 몰라. 농부가 밭을 갈고 거름을 주고 받침대에 올려 귀하게 모신 것에 감사하기는커녕 매일 불평불만이야.”
오이고추의 볼이 붉으락 푸르락 했어요.
“넝쿨은 사방천지 뻗어서 온 밭을 어질러놓고는 덩치 값을 못해.”
청양고추들 입술이 새초롬해졌어요.
그러고 보니 저 아래 밭고랑 수풀 속에 뒹굴어진 짱이는 농부의 손길은커녕 눈길도 닿지 않았어요.
사실 농부는 늘그막에 농사를 시작한 초보였어요. 도시에 사는 자식들 오면 싱싱한 채소를 먹이고 싶어서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심어보는데 많이 서툴지요.
며칠 전 수박밭을 들여다볼 때 알아차렸을 거여요.
“아이쿠! 덩이야 동이야, 며칠 새 몰라보게 자랐구나. 네가 첫째인가? 아니 네가 첫째인가? 요즘 깜빡 깜빡 잊어버리는 일이 잦아서 큰일이구나. 어쩌니 순서를 모르겠구나. 너희들 등에 순번을 붙여둘 걸 그랬다.”
그러더니 무릎을 탁! 치며 말했어요.
“아니다. 너희들이 나를 도와주면 되겠구나. 속이 꽉 차면 너희가 등에 까만 줄로 표시를 해 주면 좋겠구나.”
그래서 동이와 덩이는 엉덩이를 들썩이며 똑똑히 보여주었지요.
“네! 나는 일주일 후면 되요.”
동이가 말했어요.
“나는 3일 후에요.”
덩이가 묵직하니 말했어요.
“음…음 나는 20일 후에요.”
밭고랑 밑 수풀 속에서 기어들어가는 소리의 짱이 부탁은 농부가 못 알아들었다 치더라도 덩이와 동이가 보낸 신호는 똑똑히 보았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도 농부는 수박밭을 쌩 스쳐 지나가버렸어요. 농번기라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거든요.
그러나 저러나 밭고랑 깊숙이 굴러 떨어진 짱이는 수풀더미에 첩첩 가려져 햇빛을 전혀 볼 수 없어요. 혼자라서 무섭기도 하고요. 멀리서 들려오는 농부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려 숨을 죽이고 살다보니 목소리는 더욱 작아졌어요.
목소리는 작지만 짱이는 날마다 감사기도를 한답니다.
‘농부님, 오늘도 뿌리 근처 거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농부님. 오늘은 줄기 근처 풀을 매어주시니 감사합니다.’
짱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은 깜깜한 밤입니다. 언제부턴가 무서움을 떨치려 노래를 부르게 되었는데요.
“♬♪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훌쩍!”
울지 않는다고 노래는 했지만 짱이는 기어이 훌쩍이고 맙니다.
그러던 어느 날밤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어요.
짱이가 노래를 부르면 누군가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 소리가 얼마나 맑은지 마치 유리구슬 부딪는 소리 같았어요.
“누,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짱이는 바짝 긴장했어요.
밤이 깊어질수록 노래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왔어요.
짱이는 무서워서 밭고랑 아래 바짝 엎드렸어요.
“짱이야, 나는 다소곳농장 울타리를 굽이굽이 돌아 흐르는 개울물이야.”
짱이는 귀를 의심했어요. 그러나 용기를 냈어요.
“뭐? 농장 주변에 개울이 있다고?”
“그럼, 아주 맑은 물이 흐르는…….”
“그런데 개울물 소리가 낮에는 안 들렸어. 밤에만 들리는 걸 보니 밤에만 흐 르는 거야?”
“아니, 봄여름가을겨울 밤낮으로 쉴 사이 없이 흐른단다. 저 뒤에 운동산 골 짜기가 깊잖니. 밤이 되면 이 골짜기 모든 생물들이 잠자리에 드니까…….”
“아! 그래서 내 노래소리를 들었구나? 그러면 내가 우는소리도? 아이 창피 해!”
짱이는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워졌어요.
“짱이야, 이제는 외로워하지 마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으니까. 밤이 되면 항상 노래를 불러줄게. 오늘같이…….”
그 날부터 쨩이는 밤마다 맑은 물소리와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그러는 사이 짱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이제 수풀 밖으로 엉덩이가 조금 내보일 정도가 되었어요.
농부가 수박을 수확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어요.
“어디보자. 잘 익은 수박을 두드리면 맑은 소리가 난다더라.”
농부는 덩이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살살 두드렸어요.
“턱! 턱! 턱!”
“엥! 덩이의 소리가 왜이래?”
농부는 얼른 덩이 속을 들여다보았어요.
“아이고 이를 어쩌나 속이 타다 못해 올라붙었구나.”
이번엔 동이의 엉덩이를 조심스레 세 번 두드렸어요.
“툭! 툭! 툭!”
농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어요. 동이는 너무 강한 햇볕을 받아 농익어버렸는지 피멍이 들었어요.
초보 농부의 양 어깨에 기운이 쭉 빠졌어요. 여름 내내 힘들게 키운 수박을 그냥 버리게 되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수박줄기는 그냥 걷어내야 하는데요. 수풀 속 엎드려있던 짱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어라! 여기에도 수박이 있었구나. 놀라워라.”
농부는 쨩이를 안아 밭두둑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두드려보았어요.
“통! 통! 통!”
“어머! 이 맑은 소리는 잘 익었다는 소리구나.”
짱이는 처음으로 자기 몸뚱이를 돌아보았어요. 둥그런 엉덩이에 검은 줄이 또렷이 그려져 있고요. 앙증맞은 배꼽은 작고 얼마나 예쁜지요.
농부가 짱이를 품에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말했어요.
“햇볕도 들지 않는 곳에서도 잘 자라 준 아가야. 너의 맑은 소리는 짱이다. 한 아름 안기는 크기도 짱이다. 속이 꽉 찬 너를 보니 내년에도 수박을 또 심고 싶구나.”
그 모습을 지켜 본 덩이와 동이의 속은 바작바작 타들어갔어요.
(순천문단 40집 원고)
성갑숙 프로필
` 순천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 졸.
` 아동문예문학상. 전남문학상.
` 1996년 『문학춘추』 시 등단
` 한국문인협회 순천지부장 역임.
` 전남문인협회 이사.
` 多少곳 농장주
` 저서/ 시집 『떠돌이 모과나무』 외 2권
동화집 『방죽거리 할아버지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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