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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매천 황현 생가

가마실 / 설인 2010. 8. 21. 18:52

 2010여름방학 특강 한국사팀은 광양에 있는 우국지사 황현 선생님의 생가를 다녀왔다. 절명시를 읽으며 선생님의 애국정신을 기려 보았다.    

 

 매천 황현 선생님은 1855년 전남 광양에서 아버지 황시묵과 어머니 풍천 노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재주가 뛰어났으며, 왕석보로부터 한학을 배웠습니다. 1878년 처음 상경하여 이건창·김택영 등과 교유하며 장안에 문명을 날렸습니다. 1883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시골출신을 차별하는 당시 관료사회의 풍토에 실망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낙향한 후 전남 구례 월곡마을에 은거하며 「매천야록(梅泉野錄)」·「오하기문(梧下記聞)」·「동비기략(東匪紀略)」등의 저술에 힘썼습니다.

 초야에 묻힌 선비였지만 선생님은 항상 나라의 앞날에 대해 걱정하는 우국의 심정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리하여 1899년 「언사소」를 조정에 올려 부정부패를 해소하고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방책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철도부설권·금광채굴권 등 각종 이권이 부패한 황실과 관리들에 의해 남의 나라에 넘어가고 백성의 생활은 도탄에 빠진 현실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국권이 강탈되자 선생님은 선비로서 행동하는 양심의 본보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문변삼수(聞變三首)」라는 시를 지어 을사5적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는 한편, 「오애시(五哀詩)」를 지어 민영환·조병세 등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자결, 순국한 애국지사를 애도하고 우국충정을 기렸습니다.

  그러던 중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경술국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섬 오랑캐에게 빼앗기고 겨레는 그들의 노예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선생님은 국록을 먹은 적은 없지만 선비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1910년 9월 10일 절명시 4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 순국하였습니다.

 

 생가 입구로 들어서는 역사팀

 생가 대청마루에서

 

 집뒤로 돌아가면 정자가 있어요

 사당은 광양시에서 공원 조성하느라 들어갈수 없었어요. 멀리서 묘지와 사당 지붕만 보고 그냥 돌아왔어요  

 

絶命詩 (절명시) / 매천 황현(1855~1910)


亂離溒到白頭年 백발이 성한 세월에 난리 속을 이르러니

幾合損生却未然 이 목숨 물리칠까 하였지만 그리 하지 못하였고

今日眞成無可奈 오늘에는 더 이상을 어찌할 수 없게 되었으니

輝輝風燭照蒼天 바람에 날리는 촛불만이 창천에 비치도다.


妖氛掩翳帝星移 요망한 기운에 가려 제국의 별 옮겨지고

久闕沉沉書漏遲 옛 궁궐은 가라앉아 글은 새고 느려터져

詔勅從今無復有 이제는 따르고 쫓을 조칙마저 다시 없을 것이러니

琳琅一綜淚千絲 옥같이 아름다웠던 우리 천가닥 눈물만 흘리도다.


鳥獸哀鳴海岳嚬 고국강산 찌그러져 짐승도 슬피울고 나는 새도 슬피우니

槿花世界己沉淪 무궁화 이 강산은 가라앉아 사라지고

秋鐙揜卷懷千古 세월의 등잔불 아래 천고의 한 덮어두니

難作人間識字人 참다운 지식인 되어 인간답기 어렵도다.


曾無支厦半椽功 일찍이 나라를 위해 반조각만한 공도 없었었고

只是成仁不是忠 다만 인자함을 이룰뿐 충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

止意僅能追尹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겨우 "윤곡"의 뜻을 따르를 뿐,

當時愧不攝陣東 의당, "진동"처럼 몰아부치지 못함을 부끄러워 할 뿐이로다.

* "윤곡"= 죽음으로 의리를 지킨 송나라 사람.

* "진동"= 의병을 모아 항거하며 의리를 지킨 송나라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