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벌자/길떠나기(국내)

(역사기행) 수원화성 2010. 6. 3

가마실 / 설인 2010. 8. 14. 11:55

순천에서 아침 8:10분 출발하여 12:40분 에 수원 도착. 성곽주변에는 식당이 없다하여

찰밥과 김치 그리고 얼큰한 것 한 병, 물병은 필수, 복장은 간편한 것, 신발은 센달을

 신고가서 걱정했으나 문제 없었음. 그리고 화성에 대한 기본적인 안내서 필독. 

  

 수원 화성은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이 강력한 왕권 강화를 위해 축조하였음.

 서인들의 지지 기반인 서울 상권에 대항하기 위해 새로운 세력 거점으로 교통 요충지 화성을 꾀함.

(정조가 단명했는데 독살설도 있었음. 그러면 현재 세종시 문제는?) 당시 농업 기술 발전으로 생산력이 증가하여

상업 활기를 띠었는데 서울에서 지방간 남쪽 유통길을 턴 것임. 화성 축성에 투입된 장인들은 노임을 지급했으며

정조는 양위한 뒤 노후를 보낼 계획을 세움으로 대규모 성이 건설함.      

    

   출입구가 사방 팔방으로 뚫려있어 어디서 부터 관람을 해야할 지 몰라 들어 선 곳은 경기도청 뒷길이었음.

그러니까 서장대 관광 안내소로 들어 섬. 산아래 화장실 부터 들러 준비를 단단히 하고

(기행하실 분은 행궁으로 바로 들어가 주차하고 다시 나와 성곽을 도는 것이 좋을 듯 함)

 

 

 산기슭 곳곳에 약수터가 있고 큰 하천을 끼고 있으니 천혜의 성터

 

       

성곽을 따라 한바퀴 관람하는데 약 3시간 소요됐음. 각 문과 누각, 누대, 봉수대가 각각의 특징을 지녔으며 200년의

세월을 아우르는 성 안과 밖의 건축물이 눈을 즐겁게 함. 

                                                                                                                                                                                                                                                                                                                                                                                                                                                                                                                                       

  

        

 

       

  

       포를 쏘는 노대 앞

 

  

 

지휘대로는 서장대가 으뜸으로 성의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사방 100리가 내려다 보임. 정조가 올라 연무장에서

훈련 받는 군사를 내려다 보았다 함. 그 외 봉수대며 포대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음.

 

 

         서장대에서 내려다 본 화성 안은 행궁이 보이고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 있음.

        성안에 건물의 높이가 그리 높지않은 것은 건축시 규제를 한 듯 멀리 성 밖은 고층 아파트가

        늘어서 있음 

 

        서장대의 깃발은 조선시대의 산물        

 

    

  

   

팔달문과 장안문은 화성 내부 남북을 연결해서 사람과 물자 유통 위해 중앙에 문을 내었고 그 외 서남암문 등은

 쪽문을 두었는가 하면 화서문 같은 곳은 아예 문이 없고 누각만 있음.

 

팔달문 주변에는 팔달문시장을 끼고 있어 출출한 여행객이 먹거리를 찾는데 용이 함. 김이 모락모락 찐빵도 좋고

옥수수도 좋지만 더운 날씨로 시원한 장소를 찾음. 팔달문을 끼고 있는 제과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테라스에서

비친 팔달문을 내다보다 뛰쳐나가 한 컷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함.

화성 행궁은 처음 수원부 관아 일부로 지었다가 증축하여 조선시대 행궁 가운데 최대 규모로 620여칸으로

 지어졌음.

이 행궁 정문(신풍루)을 들어 서면 좌로 좌익문 중앙에 중앙문 그 뒤에 봉수당이 있는데 이 봉수당에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1795)을 배풀기도 하였음. 봉수당에는 정조와 그의 어머니가 거쳐하였는데

현재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차리는 정조와 효의왕후의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모셔져 있음. 

          

  

  행궁에서 올려다 본 서장대, 용마루의 동물상이 인상적

 

 

정조의 어진

 

  

  한 많은 여인 혜경궁 홍씨,


 

정조는 1789년 10월에 이루어진 현륭원 천봉 이후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1년간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거행하였음.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함. 이후 성내에 이주하는 가옥이 늘어났으나 성곽이 왕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고 왕실을 위한

왕조사회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데다

정조가 갑자기 49세 나이로 승하하는 바람에 도시 건설 자체도 치명적인 결함이 생김.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음

.

화성행궁은 성곽과 더불어 단순한 건축 조형물이 아니라, 개혁적인 계몽군주 정조가 지향하던 왕권강화

정책의 상징물로 정치적, 군사적인 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

 

행궁까지 관람하고 다시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5:30. 돌아오는 길에 오산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에 들릴려는 계획을 취소했음. 전국이 일일 생활권이라지만 무더운 날씨에 뙤악볕을 온몸으로 받고

성곽을 돌았기에 또 장거리 운전이 자신없어  다음 기회로 미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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