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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감동 깊은 시, 어떻게 쓸 것인가?_도종환

가마실 / 설인 2011. 3. 20. 16:29

(옮긴글입니다)

 

감동 깊은 시, 어떻게 쓸 것인가?

                                                                                             도종환(시인 ․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내 문학은 가난과 외로움에서 출발했다. 평화롭던 날들은 열 몇 살 전후해서 끝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고향을 뜨면서 우리 가족은 해체되었다. 나는 외가에 맡겨졌고 앞 못 보는 할아버지는 고모네 집에 고단한 육신을 의탁해야 했으며 어머니 아버지는 강원도로 떠났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혼자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방학 때가 되면 편지봉투에 쓰여 있는 주소를 들고 어머니 아버지를 찾아 다녔다.

  부모가 있는 곳을 찾아 고등학교 진학을 했지만 거기서도 정착을 할 수 없었던 아버지가 또 경기도로 떠나면서 나 혼자 객지에 남겨지게 되었다. 자주 양식이 떨어졌고 낯선 도시의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가난하기 때문에 대학진학을 포기했다가 국가에서 학비를 지원하는 지방 국립사범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도 나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월세 이천 원짜리 단칸방에서 우리는 살았고 사 년 내내 구들장 위에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냉방에서 잠을 자며 대학을 다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절망스러운 일이었다. 도시락 대신 소주병을 싸들고 일터로 나가는 아버지, 고모네 목욕탕에서 막일을 하는 어머니, 정신지체 장애아인 여동생, 음성나환자인 삼촌, 둘러보아도 사방팔방 절망 아닌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치스럽게 무슨 대학을 다닌단 말인가. 남들과 잘 어울리기 싫었고 자폐증, 대인기피증 비슷한 걸 앓았다. 나는 내 깊은 절망 속으로만 침잠했다. 그리고 거기서 문학을 만났다.

  문학을 이야기하고 철학을 거론하는 자리에서만 눈빛이 반짝였다. 싸르뜨르와 까뮈와 키에르케고르와 고흐와 이중섭과 장용학과 손창섭 고은과 최인훈을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이야기 할 때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실존주의의 치열한 여름과 퇴폐적 낭만주의의 황폐한 가을, 그리고 지독히도 가난한 겨울이 몇 번을 찾아왔다가 나를 쓰러뜨려 놓고 지나갔다. 

  질척한 페시미즘과 우울한 낭만주의 문학에서 내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전혀 엉뚱한 데서 나를 찾아왔다. 80년 광주였다. 그때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다. 광주에서 여수 쪽으로 내려오는 무장한 시민군 차량들을 저지하기 위해 십칠 번 국도의 한 고갯마루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언덕 양쪽에 호를 팠다. 그렇게 대치한 채 뜬눈으로 새우던 그 오월의 밤에 나는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M16소총의 탄창을 몰래 빼서 맨 위의 실탄을 거꾸로 장전해 놓았다.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게 해 놓으면서 나는 두려웠으나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향해서 총을 쏠 수는 없었다. 그리고는 군복 윗주머니에 들어 있는 군용수첩에다 시를 썼다. 그때까지 썼던 100여 편 가까운 시들을 다 버리게 하는 시였다. 

사격명령이 떨어지던 날
탄창 속의 M16 A1 신형 탄알처럼
징발된 민간차량에 가지런히 탑승되어
비포장도로를 달려갔다
정갈한 저녁 바람은 예년처럼
보리수염을 쓸어가고
개인호를 파고 들어앉은 우리 앞에
인도지나의 풍문으로 듣던 안개가
호남평야를 기어오고
바리케이드 뒤에서 제1번 실탄을
거꾸로 장전하는 짧은 순간
가장 깊은 밤의 이슬이
어깨를 밀고 들어왔다
그 밤 터무니없는 죽음의 가도에서
고려 중기의 젊은 농군을 만나고
망이와 망소이를 만나고
정중부의 다듬어진 칼과 보현원의 차디찬
화강암에 이마를 부딪고 쓰러진
그 흔한 죽음의 기록도 없는 한 야사의 문신들을 만났다.
17번 국도에서 역사를 우롱하던 바람은
한 찰나도 빼놓지 않고 피묻은 뻐꾹새 울음을
귓가에 실어오고 부대끼는 밤 구름을
능선 위에 옮겨왔다
안전장치를 풀고 방아쇠를 당겨도
이제 나의 개인 화기는 발화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역사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역사여
구름 그림자에 눌리운 이 깜깜한
오월의 국도 위에서
참으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지
당신도 헤아리고 있는가

                                        -「삼대 8. 사격명령」

「사격명령」이란 시였다. 개인적인 절망에서 역사와 사회와 현실 쪽으로 유턴을 하게 한 시였다. 그러나 광주의 체험은 나 하나의 알량한 양심을 지킨 것으로 끝나지 않는 부끄러운 기억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나 갚아야 할 부채였다. 그렇게 역사를 끌어안고 눈물 흘리고, 시대의 고통과 함께 괴로워하면서 나의 문학은 현실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제대 후 문단에 나올 무렵, 우리에게는 발표지면이 없었다. 『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 『세계의 문학』은 강제 폐간되었고 신문과 방송도 마구잡이로 통폐합될 때였다. 우리가 발표할 지면을 스스로 만들자 그렇게 생각하면서 『분단시대』라는 동인지를 만들었다. 『오월시』, 『삶의 문학』, 『시와 경제』, 『자유시』 등의 동인지와 『실천문학』같은 무크지가 문단의 돌파구를 만들어 나가던 무렵이었다. 창비에서 첫 시집 『고두미마을에서』를 낸 것도 그 무렵이었다. 

  결혼 이 년여 만에 아내와 사별한 것도 비슷한 팔십 년대 중반이었다. 절망은 내가 저를 떠났다고 절망도 나를 떠난 건 아니었다. 많이 힘들었고 많이 아팠다. 그 어려운 시기에 실의와 좌절의 늪에서 나를 건져 준 것은 시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거냐고 빈 하늘을 향해 소리칠 때 시가 대답을 해 주었다. 내 외로움, 내 그리움, 내 슬픔도 시가 어루만져 주었다. 내가 울면서 쓰지 않은 시는 남들도 울면서 읽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병동 날바닥에 앉아 희망이 있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암환자들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죽음과 맞서 싸우는데 살아 있는 동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싸움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암병동」이란 시를 썼다. 

희망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믿음이 있는 싸움은 행복하여라
온 세상이 암울한 어둠뿐일 때도
우리들은 온몸 던져 싸우거늘
희망이 있는 싸움은 진실로 행복하여라 
                (.......)
희망을 가진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앞길 전혀 보이지 않는 어둠이 때도
우리들은 암흑과 싸우거늘
빛이 보이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새벽을 믿는 싸움은 얼마나 행복하랴.

                                            -「암병동」중에서 

  전교조를 만드는 일에 참여했다가 어미 없는 어린 자식들을 두고 감옥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부자의 의를 끊겠다고 하셨을 때, 아직 학교도 못 들어간 어린 아들이 보낸 편지를 받고 감옥의 벽에 십자가를 그어 놓고 울면서 기도할 때 시가 있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해직교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막막해 할 때도 시가 길이 되어 주었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담쟁이」전문

  「담쟁이」란 시처럼 내게 길이 되어 준 시가 많았다.

  이 땅에 가진 것 없이 외롭고 가난하게 태어나 문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고 절망과 시련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해 준 것이 문학이라서 문학을 하며 살게 된 것을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가 던진 교육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책임져야 할 몫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여 복직한 시골학교에서 정말 열심히 선생노릇을 했다. 모순의 한가운데서 나를 다시 검증하고 거기서 다시 출발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몸이 아파 지금은 쉬고 있다.

  산속에 들어와 지내는 동안 나는 그저 간소하고 단순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나를 빈 밭처럼 내버려두었다. 좋은 사례를 만들어 남에게 자랑할 거리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하루 종일 새소리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깊은 산골짜기, 사람 사는 동네하고도 멀리 떨어진 산 속 외딴집은 적막하고 무서웠다. 밤에는 혼자서도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잤다. 법주리. 동네 이름은 법주리인데 부처의 법은 어디 머물고 있는지 안 보이고 나무와 숲만 보였다. 적막하고 낯선 산중으로 유폐된 내 삶이 측은하기도 했다. 사방이 고요하여 나 혼자 소리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나도 자연히 고요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의 속도는 저속으로 늦추어 지고 부드러운 속도로 바뀌다가 마침내 스콧니어링이 말한 평온한 속도가 되었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이 찾아와 나와 함께 지내기 시작하면서 하늘의 별들이 수없이 지붕 위에 와 모여들었다. 별들이 몰려와 노는 걸 보기 위해 유리창 밑에서 자다가 밤에 몇 번씩 깨기도 했다. 내가 아프지 않았다면 내 생에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니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른 봄에 내 곁에 와 피는
봄꽃만 축복이 아니다
내게 오는 건 다 축복이었다
고통도 아픔도 축복이었다
뼈저리게 외롭고 가난하던 어린 날도
내 발을 붙들고 떨어지지 않던
스무 살 무렵의 진흙덩이 같던 절망도
생각해 보니 축복이었다
그 절망 아니었으면 내 뼈가 튼튼하지 않았으리라
세상이 내 멱살을 잡고 다리를 걸어
길바닥에 팽개치고 어둔 굴속에 가둔 것도
생각해 보니 영혼의 담금질이었다
              (........)
육신에 병이 조금 들었다고 어이 불행이라 말하랴
내게 오는 건 통증조차도 축복이다
죽음도 통곡도 축복으로 바꾸며 오지 않았는가
이 봄 어이 매화꽃만 축복이랴
내게 오는 건 시련도 비명도 다 축복이다

                                            -「축복」전문

   시인은 누구나 제가 끌어안고 뒹구는 아픔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아픔이라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 하였다. 그러는 동안 비명과 내가 하나가 되어 있을 때도 있었다.

  한때 우리는 문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내가 거기 깃발 하나로 서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아프면 내가 아팠고, 내가 아파서 내 시도 분노와 슬픔을 끌어안고 끙끙 앓았다.

  그리하여 슬픔과 나는 거리가 없었다. 슬픔이 내가 되어 흐르고 있거나, 분노와 내가 한 덩어리로 타고 있는 걸 나도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를 쓰며 사는 삶이란 결국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인지도 모른다. 유리창 건너편에 묻어두고 온 고통을 꺼내 혼자 밤을 새워 닦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 슬픔 그 초독을 보석처럼 박히게 하는 일이다.

  그동안 나는 너무 많은 말을 하였다. 내 운명에 대해 너무 많은 설명을 하려 하였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남발하였다. 문학지에 활자화 되어 있는 내 시를 보다가 잘 접어서 간직할 때보다는 던져버리는 날이 많았다. 한 권의 시집을 묶을 때마다 조급하였다. 아홉 권의 시집에서 발췌하여 시선집 한권을 묶으려다 가려 뽑을 만한 시가 별로 없는 걸 보고 절망하기도 했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쓰지 못하였다는 걸 알고 낙심하였다. 입으로 시를 쓰고 팔다리로 시를 썼다. 헛되고 헛된 시 참 많이 썼다.

  지지난 해 가을 어느 음악회에서 가수의 노래가 잠시 멈춘 사이 간주의 시간을 채우고 있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었다. 채 몇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을 빨아들이고 있는 바이올린 소리가 가슴을 후벼 파며 들어왔다. 나는 내 시가 저렇게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내 시, 내 삶이 남의 가슴의 방파제를 뒤흔들어 놓는 파도로 부서지고 있는지, 그럴 가능성은 있는지 물어보았다. 물결도 없이 파도도 없이 나는 시인인지 물어보았다.

  로댕은 “예술은 감동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나의 시가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없다면 나는 언제까지 시인인가? 단 몇 분도 숨을 멈추게 하는 선율로 존재하지 못하면서 언제까지 우리는 미끄러지는 언어를 붙들고 사기를 치고 있어야 하는가?

  문학 아닌 것을 향해 빠져드는 삶,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옮겨가는 욕망, 그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부재를 향해, 부재만이 실재인 결핍을 채우기 위해 멱살 잡혀 끌려가는 삶을 때려 엎고 싶었다. 거덜 나고 싶었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면 여기서 그만 멈추고 싶었다. 감동을 주는 한 편의 시를 쓰는 일 그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도종환 시인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를 통해 작품 활동.
*시집 『접시꽃 당신』『고두미 마을에서』『부드러운 직선』 외 다수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등
*현재 주성대학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한국 작가회의 사무총장. 현재 TV특강 등을 진행하고 있음
*이메일 : djhpoem@hanmail.net

 

 

출처 : 박종국 수필가의 일상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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