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상상력
최영철(시인)
시적 상상력의 기본은 첨예성입니다. 첨예성은 극한에서 만나는 예리한 칼날 같은 성격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꽃을 예를 들어 봅시다. 꽃은 아름답고 향기롭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시를 쓸 수는 없습니다. 꽃의 아름다움이나 향기롭다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시의 소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꽃의 잔인함, 꽃의 추함, 꽃의 가련함 쪽으로 소재를 포착해 내야 합니다. 꽃이 만개한 상황은 첨예한 상황이 아닙니다. 첨예한 시점은 꽃이 막 돋아나려고 할 때, 씨가 흩어질 때, 찬바람 서리가 내리고 있을 때가 첨예한 시점이라고 보여집니다.
동백꽃을 노래하는 시인이 많습니다. 동백꽃이 가지고 있는 처절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입니다. 동백은 통꽃이 어느 순간 뚝 떨어져 버립니다. 몸통 그대로 떨어지는 무시무시하고 으스스한 상황을 시인들이 보는 것입니다.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늙고 병들어 죽어 가는 것은 큰 사건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1, 20대의 꽃다운 젊은이가 갑자기, 그것도 처참하게 죽었다면 그 죽음에 첨예성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심사를 보고 있는 각종 독자문예에 수많은 글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투고된 작품들이 대게 이런 그물에 걸립니다. 첨예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을 골라서, 아름답게 쓰는 것이 시의 전부가 아닙니다. 첨예성의 차이가 전문가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적상상력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나 해 드릴까 합니다. 조선시대 고종 때 허소치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지금도 잘 알려진 화가입니다.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고종이 허소치를 불러 그림을 부탁한 일이 있습니다. 고종이 부탁한 것은 춘화도였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춘화도가 아닌 요즘 말로 포르노에 가까운 그림을 부탁 받았습니다. 허소치는 왕의 부탁을 거절치 못하고 말았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던 허소치가 드디어 그림을 완성해 왕에게 바칩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조용한 마을에 집 한 채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그 앞에 평상과 댓돌이 있었는데 그 댓돌에 남자와 여자의 신발을 그려 놓았습니다. 허소치는 방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게 만든 것입니다. 시적 상상력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본질을 방안에 숨겨 놓고, 본질을 떠 올릴 수 있도록 주변 묘사만 적절히 툭툭 배치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공을 착한 사람으로 만들려면, 주인공의 주변의 사람들을 악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면 주인공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고자 하는 본질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인 것입니다.
동양화에서 달을 그릴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서양화에서는 달 자체를 채색해야 하지만 동양화에서는 달 주변을 채색하면 됩니다. 주변을 어둡게 채색해 밝은 달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다시 말해 드러내고자 하는 본질은 드러내지 않고 주변을 묘사하고 드러내는 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적 상상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간접 경험에 의한 상상력입니다. 경험은 직접경험과 간접경험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작가는 대게 이 경험을 통해서 작품을 쓰게 됩니다.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중 어느 쪽이 작품 쓰는데 더 도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경험한 것이 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자기에게 엄청나게 절실한 경험, 가령 부모 형제의 죽음이라든지, 시골에서 살게 되었다든지 하는 것들이 시가 되기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체험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직접경험의 한계입니다.
여행담을 듣고 있으면 자기가 그곳에 가보지 않았더라도 그곳을 상상하는 즐거움에 푹 빠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몇 번 기회가 닿아 일본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갈 때마다 시 몇 편을 써 보리라 마음 먹어 보았지만 막상 여행지에서는 이곳저곳 바쁘게 다니느라고 제대로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친구의 여행담을 들으면서, 여행을 다녀 온 후 미련이 남는 부분을 생각하면서 시를 쓰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저의 시 <홍매화 겨울나기>입니다.
홍매화 겨울나기
그해 겨울 유배 가던 당신이 잠시 바라본 홍매화
흙 있다고 물 있다고 아무데나 피는 것이 아니라
전라도 구례 땅 화엄사 마당에만 핀다고 하는데
대웅전 바로비나불 봐야 뿌리를 내린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막 몸을 부린 것 같아
그때 당신이 한겨울 가지 어루만지며
뭐라고 하셨는지
따뜻한 햇살 내린다고
단비 적신다고
아무데나 제 속내 보이지 않는다는데
꽃만 피었다 갈 뿐
열매 같은 건 맺을 생각도 않는다는데
나는 정말 아무데나 내 알몸 보여주고 온 것 같아
매화 한 떨기가 알아버린 육체의 경지를
나 이렇게 오래 더러워졌는데도
도무지 알 수 없을 것 같아
수많은 잎 매달고 언제까지 무성해지려는 나
열매 맺지 않으려고
잎 나기도 전에 꽃부터 피워 올리는
홍매화 겨울나기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
이 시는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본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말 잠깐 소개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굉장히 강력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머리에 가슴에 박힌 것입니다. 저는 그 느낌으로 본적도 없는 홍매화에 대한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저는 홍매화 매니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나중에 보니 홍매화는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가까이 통도사에 가면 홍매화가 있습니다. 종각 옆에 제법 오래된 홍매화가 있습니다. 저녁 타종 시간, 대략 5시 30분쯤, 종각에 기대어 타종을 들으며 마지막 햇살이 홍매화를 쓰다듬는 모습을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렇게 실물을 보지 않더라도 시를 쓸 수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갖가지 프로그램, 다큐맨타리 심지어 드라마에서 얻은 간접 경험으로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물론 드라마 전체를 보고서는 시를 쓸 수 없습니다. 찰라를 봐야 합니다. 인상적인 장면 한 두 개만 포착해도 드라마 또는 영화를 본 것입니다. 시를 위해선 이렇게 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신문을 볼 때도 단신, 가십란을 잘 보아야 합니다. 이런 기사를 그냥 넘길 것이 아니라 장편소설 하나를 쓸 수 있을 만큼의 상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감상, 느낌으로 그쳐서는 시든 소설이든 작품을 쓸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부산일보에 영덕 인근의 복사꽃 길 사진이 실렸습니다. 마음이 동해 친구와 함께 다음달 바로 동해 바다로 출발했습니다. 마음 속에 사진 속의 복사꽃을 가득 담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서 보니까 복사꽃 잎이 다 떨어진 뒤였습니다. 신문이 가끔 이런 예측 오보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눈에는 그것들이 빈 가지가 아니고 꽃이 가득한 가지로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상상력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다음은 은폐된 것에 대한 상상력입니다. 저의 시 <선미 OB>입니다.
선미 OB
버스 내리면 보이는 선미OB
아무 장식 없이 작은 간판 하나 달랑 걸린 집
이상해라 안이 보이지 않게 닫힌 문 위로
꼬마 전구 아슬하게 불 밝히고 있는 집
지날 때마다 바라본다.
꽃들은 피어 있을까
사내들 목마른 가슴에 물을 길어주는 양지꽃
환하게 지저귀고 있을까
노래하느라 지저귀고 있을까
노래하느라 부리만 길어진 입술
날지 못해 가려운 겨드랑이 다듬고 있을까
색색의 꽃씨 쪼아들고
사내들은 둥근 주탁위에 내려 앉겠지
몇잔 술에 부드러워진 더듬이로
겨드랑이 간질이면
꽃들은 빨강 노랑 꽃씨를 퍼뜨릴 거야
펑펑 까르륵까르륵 터지는 꽃가루
작은 간판 비추는 꼬마전구는
술잔 가득 피어 오른 꽃 한 송이 마시고
불 밝히겠지
풀풀 향기를 터뜨리겠지.
은폐된 것에 대한 상상력은 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보이는 것에 대한 상상을 말합니다. 소재가 된 선미OB는 저의 집 가는 길, 그러니까 양정에서 동의의료원 쪽으로 가다보면 육교 밑에 보이는 조그만 술집입니다. 보통 술집은 창이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데 이 집은 창이 없고 나무로 만든 출입문만 있습니다. 저는 10 여년동안 그 집 앞을 지나면서도 한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저 조그만 출입문 안에 어떤 풍경이 있을까 상상만 해왔습니다. 그 상상력으로 시를 쓰고 발표를 한뒤, 친구와 그 술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나의 상상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너무 형편없고 지저분했습니다. 40대 후반은 되어 보이는 주모가 운영하는 술집이었습니다. 나는 친구와 함께 한바탕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사먹을 때 어느 시점에서 가장 청량감을 느낄까요? 아마 자판기에서 음료가 막 떨어진 것을 잡을 때 손 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가장 시원할 것입니다. 음료를 마실 때도 캔을 따 마시는 첫 모금이 제일 시원할 것이고 그 다음부터는 청량감이 줄어듭니다. 이것을 문학에 비유한다면 캔을 열고 내용물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상상력이 발동할 여지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설을 쓸 때 취재를 어디까지 해야 하는 가 하는 문제도 이와 연관이 됩니다. 소설가들은 취재를 하면 할수록 글을 쓰기 어렵다고 합니다. 역사 소설의 경우도 자료를 다 찾아 읽고 나면 그 자료에 인물이 묻혀 살아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취재는 적당한 선에서 그쳐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고 은폐된 것에 대한 상상력이 문학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몇 해 전 세계일보의 신춘문예에 <정동진>에 대한 시가 당선되었습니다. 그 시인은 시를 쓰기 전 정동진에 직접 가보지 않았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나중에 시인은 그 지역 주민들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해서 직접 가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을 직접 가 보고는 '안 가보고 시를 쓰길 잘했다'고 말합니다. 아마 미리 가 보았더라면 그 곳 풍경에 묶여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음은 과거 시간을 향한 상상력에 대한 것입니다. 나의 시 <순장자처럼>입니다.
순장자처럼
그 아래 눕고 싶다
나무 아래 돌 아래
하루 다한 햇살 아래
그러면 보이리라
저 나무는 나를 비추려고
저 바위는 나를 가리려고
얼마나 힘든 시간을 서 있었는지
저 햇살 저 바람은
나 모르게 와서 꽂히려고
얼마나 엉뚱한 길을 맴돌다 왔는지
주인님 발치에 다소곳이 앉으며
부끄럽게 고개 숙인 순장자처럼
저 나무와 돌이 잘 지나가도록
저 햇살과 바람이 잘 피어나도록
덧널무덤 구덩이에 피어오르는 봄기운
서로 와서 눕겠다고 재잘거리는
새, 아이들 소리
현재의 공간은 익숙한 공간이지만, 과거와 미래의 공간은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학적 상상력이 많이 발휘될 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렇다고 과거와 미래가 그저 거기에 머무는 개념은 안됩니다. 과거에 정지해 본다면 오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당대의 시간에 어떻게 비출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현재와의 끈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가 미래에 어떤 의미로 확장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 시에서 생각해 보고자 했던 것은 기쁘게 순응한 순장자, 망자와 시간을 같이 했던 시간, 공간, 시대가 같이 드러눕고, 다음세대로 넘어가는 의미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생명력이 없는 옛 고분을 보면서, 이것을 현재의 시간에 가져와서 주변배치(꽃,나무,돌)를 한 것입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주변 장치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배치하는가 하는 것이 시적 구성에 있어 중요합니다. 시적 진실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변을 잘 배치해야 합니다. 필요 없는 것을 축소하고 필요한 것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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