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초심 닦기 (2) / 위선환 (시인)
문인이 된다는 것, 혹은 시인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개인적 욕망을 채우는 일로 끝나는 것 같아 서글퍼질 때가 있다. 특히 시를 장신구로 활용하고 싶은 사람들을 유혹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문예지를 보면 역겨움이 느껴진다. 등단 기회 제공을 최후의 목적으로 하는 정체 불명의 문예지의 범람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 잡지에 유혹 당한 사람들은 자신의 가슴에 시인이라는 명찰을 달아준 대가로 정해진 거래를 따라야 한다. 수백 부씩 그 잡지를 구매해야 하고 편집자에게는 전혀 문학적이지 않은 향응도 제공해야 한다. 말하자면 시인을 사고 파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들이 특정 문인단체에 가입을 하고 회장 선출 등의 투표권을 행사하면서 또 하나의 문단 권력 만들기에 기여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이 바로 이상한 시인의 나라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시인의 나라는 진정 만들 수 없나. 시인이 되는 일에 급급해 문학의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가 되지 말고 시를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가 맑아지는 꿈을 꿀 수는 없나. 시인이라는 간판을 그럴싸하게 걸어 놓고 전을 펼치지 않아도 그 삶이 곧 시인인 사람 어디 없나.
- 안도현의 "이상한 시인의 나라" 부분
<추기> 다음은 라즈니쉬의 '남전' 어록강의(손민규 옮김)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내 경우에는 예이츠의 역할을 스스로 한 점이 다르다.
타골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에 이상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는 『키탄잘리』라는 작은 시집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원래 그 시집은 타골의 모국어인 벵골어로 씌어졌다. 그 다음에 그는 자신의 시를 영어로 옮겼다. 그런데 그는 영어로 옮기면서 망설이게 되었다. 영어로 옮긴 시가 그의 모국어만큼 아름다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인도에 살고 있던 유명한 선교사 엔드류에게 부탁했다.
「당신이 살펴보고 만일 문법적으로 틀리거나 언어학적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내가 고칠 수 있도록 지적해 주시오.」
엔드류는 해박한 지식을 갖춘 선교사였다. 그는 타골의 시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만 네 구절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이 네 구절만 바꾸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시가 될 겁니다.」
그래서 타골은 엔드류의 의견을 따라 네 구절을 바꾸었다.
타골의 친구이며 훌륭한 시인인 에이츠가 타골을 시인들의 모임에 초대했다. 그 모임을 통해 타골은 런던에서 처음으로 키탄잘리를 읊기로 되어 있었다. 타골의 시를 듣고 모든 사림이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 시집은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책이다. 세상에 그와 비교될 수 있는 문학작품은 극소수이다.
그런데 예이츠는 다소 석연치 않은 기색을 보였다. 그가 타골에게 말했다.
「아주 훌륭합니다. 그런데 네 구절에서 무언가 잘못되었어요.」
그 네 구절은 엔드류가 집어넣은 것이었다. 예이츠는 그 네 구절을 정확하게 지적하면서 말했다.
「여기에서 시의 흐름이 끊겼습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개입했어요. 지식에 얽매인 사람이...., 원래 당신이 쓴 구절은 문법적으로 틀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언어의 규칙이나 문법에 얽매이지 않고 가슴에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시인의 자유입니다. 여기에다 당신 자신의 구절을 집어넣으십시오.」
그래서 타골은 엔드류가 써넣었던 구절을 자신의 언어로 바꾸었다. 그러자 예이츠가 말했다.
「이제 시의 흐름이 완벽해졌습니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요.」
<추기> 다음은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3년 11, 12월호에 실린 양애경 시인의 글이다.
'시라는 것은 웬지 모를 모호한 부분이 있어야 멋져 보이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여러 번 보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습작기에는 '모호함의 문학적 효과' 보다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전달하는 기술'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납득시키기가 참 힘든다. 시에는 기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며, '그럴듯해 보이는 기술'이 좋은 시를 쓰게 해 주지는 않는다. 쓰는 이의 영혼이 담겨야 할 것이다.
<추기> 다음은 [시작] 2003년 겨울호에 실린 이명원의 평론 ‘속도성을 거슬러서’에서 발췌한 글이다.
적어도 동일화를 기본원리로 하는 시의 장르적 특성 때문에, 새로움에 대한 속도전이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자기와 세계를 유기적인 연관 아래 포섭하고 미적으로 형상화하는 시의 원칙, 즉 ‘은유의 수사학’으로 지탱되었던 전통적인 수사체계의 급격한 붕괴는, ‘환유의 수사학’으로 명명될 수 있는, 의미의 중심을 분산시키고 파편화시키는 새로운 시적 언술방식의 출현과 함께, 사실상 시의 언어를 분열증환자의 언어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상태로 하강시킨다. ‘무의식이 나를 말한다’로 표현할 수 있는 이러한 시적 상황의 변모는, 그것이 필연적인지 아니면 불가피한 것인지는 모르나, 시에 대한 독자들의 향수 권리를 박탈시키는 새로운 역리(逆理)룰 파생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문명의 혁신과 속도성에 대한 숭배, 새로움의 특권화는 역설적으로 문화적 문맹화를 더욱 부추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새로움과 속도성에 대한 숭배는 심원한 사유에 기반한 지혜와는 사실상 무관한 지식과 정보의 파편 속에서, 대중들의 감수성을 이른바 ‘문명 속의 야만인’의 상태로 구조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번성하는 것은 안일하면서도 말초적인 감상주의에 기반한 상투적 감정배설의 언어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자체가 사실상 역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들은 우리시대의 시적 새로움을 이 악무한적 속도성을 ‘거스르는’ 지점에서 찾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시를 알쏭달쏭한 담론의 수준으로 퇴행하게 만드는 관행화된 시작법의 매너리즘에서 탈피하여 삶에 대한 연속성의 감각을 복원시키고, 이제는 거의 멸종되다시피한 ‘육성(肉聲)을 되살리는 한편, 공감과 감흥을 기반으로 한 ’감정교육‘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복고적이며 관조적인 서정의 세계로 귀한하는 시대착오를 반복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감흥이랄까 공감이 전제되지 않은, 싸늘한 개념적 원리에 입각한 시쓰기는 새로움이라기보다는, 얼마 지나지 않아 폐기될 ‘미래의 골동품’일 것이기 때문이다.
<추기> 다음은 월간 [현대시] 2003년 12월호에 실린 좌담 내용 중 부분이다. 발언자는 평론가 이재복이다.
저도 올해 신인들을 대상으로 몇 편 글을 썼는데 신인들의 시에서 참신하다는 작품을 발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사실과 함께 시가 서술화되면서 긴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이것의 원인은 '지금' '여기'에서의 문화의 획일성과 가치의 무차별화에서 찾을 수도 있고 또 제도화된 문학교육 속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시는 붕어빵처럼 제도화된 교육을 통해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삶의 현실이 배제되면서 함께 배제된 것이 아웃사이더적인 의식과 지적인 모험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도적인 보호라고나 할까, 이 제도에 길들여지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나 진리에 대한 지적인 모험을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시가 대체적으로 그 수준의 평범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학의 국문과나 문창과를 다니면서 특히 문창과를 다니면서 제도화된 교육을 받은 신인들의 시가 등단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이 사실입니다. 문학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학과가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의 왜소성과 매너리즘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앞장 서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식의 교육을 받고 문단에 나온 올해의 신인들의 시가 대부분 그렇다고 봅니다.
<추기> 다음은 중앙일보 이경철 기자가 쓴 '신춘문예에 응모하려는 분들에게' 중 부분이다. 현장의 발언이다.
예전, 좀더 정확히 말해 1990년대 이전까지 문학도들은 선배 문인들의 작품을 읽든지, 직접 개인적으로 찾아가 지도를 받든지 하는 직, 간접의 사사(師事) 방식으로 창작 수련을 했습니다. 신경숙씨 같은 작가는 좋아하는 작품을 꼼꼼히 옮기는 방식으로 문학 수업을 했다합니다. 찬찬히 음미하며 필사하다보면 문체의 향기는 물론 작가의 숨은 의도도 그냥 읽을 때보다 더 잘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특히 시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필사로서도 성에 안차면 존경하는 기성작가에게 자신의 창작을 직접 들고 가 문인으로서의 가능성은 물론 작품의 잘잘못을 지적 받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사식 창작교육에서는 문학도로서 가장 중요한 개성은 물론 문학, 문인으로서 끝끝내 지켜내야만 할 진정성과 절실성을 견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충동된 그 어떤 절실한 것이 먼저 창작으로 나아가게 했으니까요.
그러나 문학 수업이 학원화, 실기화 되면서 사정은 달라진 듯 합니다. 90년대 초반은 각종 문화센터의 문학창작반 수강생들이 신춘문예, 특히 소설 부문을 싹쓸이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그렇게 나온 당선자 중 지금까지 창작활동을 펴고 있는 작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창작 교육을 잘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취재한 바에 의하면 그들은 몇 명씩 그룹으로 유명 작가 밑에서 자신들의 창작품 1, 2편만 가지고 1, 2년씩 교육을 받았습니다. 시류에 걸맞는 주제의 작품을 계속 지적을 받아가면서 그토록 오랫동안 고치고 가다듬었으니 주제 좋고 소재 좋고 구성 기막히고 문장 정갈하여 신춘문예의 예, 본심을 미끈하게 통과할 수밖에요.
그러나 등단 후가 문제입니다. 이제 홀로 놓여져 써야할 기성 문인의 입장으로 작품 구상도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할 수밖에요. 신춘문예 당선자로서의 자존심은 강하고, 작품은 안나오니 이중으로 죽을 맛이겠고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차라리 좋은 문학 독자, 애호가로 남아 더 행복했을 많은 사람들이 문인으로 들어와 고통을 당하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이런 관계로 90년대 후반 들어서부터 신춘문예 심사에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 참신성, 개성, 실험성 등을 더 따지게 됐습니다. 물론 각 장르의 문법에 맞고 문장이 정확해야 함은 기본입니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일부 젊은 여성 작가들 중 여성의 은밀한 욕구과 감성을 발랄하게 까발리며 주목은 받고 있으나 문학의 기본기가 의심스러운 작가들 또한 도태됐거나 문인으로서의 생명 또한 길지 않을 것은 뻔하기 때문에 자기만의 문장이면서 정확한 구사야말로 문학의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추기> 다음은 대구카돌릭문학 13호에 실린 강희근의 글 중 일부이다.
시에서 종교를 다루게 되면 실패율이 높다. 주제가 시의 전면에 서기 때문이다. 형식과 세계의 일원적 성취가 종교를 다룰 때는 이루기가 힘들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말하자면 세계가 형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추기> 다음은 남진우의 "신서정과 젊은 시인" 중의 일부이다.
......다시 말해서 신서정은 이미 그 태동 자체에서 어느 정도 복고성과 회귀성을 요청받고 있는 셈이며 무분별한 궤도 이탈 대신 원상복구에 더 많은 노력을 경주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시나 해체시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시인들이 이전의 과격하거나 방만한 몸짓을 지양하고 서정시가 가진 본래의 성격을 점차 회복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부류의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세계와의 긴장된 대결의지이기보다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현실의 소용돌이에서 한 걸음 물러선 채 사태를 관망하는 성찰적 시선이다. 한결 정돈되고 정제된 어조로 내면을 깊숙이 응시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들 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소통과 호환을 중시하는 유기체적 세계관에 경도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의 작품에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암시한 바와 같이 1990년대 젊은 시인들은 다들 도전적인 정복자가 되어 제위 찬탈에 나서기보다는 물려받은 영지를 잘 관리하고 가꾸는 제후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새로운 시문법을 제시하고자 하는 야심을 불태우기보다는 기존 문법에의 적응 및 숙달에 더 민감한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상대적으로 개개 시편의 완성도는 더 높아진 편이다. 이처럼 조숙한 젊은 시인들이 많아지는 것은 한편으로 안심을 주면서 다른 한편으로 왠지 맥이 빠지게 만든다. 다들 너무 안전한, 성공이 보장된 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더욱이 그 성공이란 것이 일정한 높이 이상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 계열의 시인 가운데 상당수는 종종 따뜻한 감성 탓이기도 하겠지만 낙천적이라 할 만큼 세계와 쉽게 몸 섞는, 그래서 때로 시를 예정된 화해의 공간으로 인도하는 부정적 효과를 산출하기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신서정 또한 이제 해체와 갱신의 역학에 몸을 맡길 시점에 이른 듯하다. 이 시대의 서정은 좀더 사납고 가혹한 언어에 의해 단련될 필요가 있다.(1998)
<추기>다음은 이성부 시인이 [열린시학] 2003년 겨울호에 자선한 대표작 "봄"에다 붙인 시론 중 일부이다.
사물(대상)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여 얻어진 것을 시라고 합니다. 이때 사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에 따라 시의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각을 여늬 사람들과 달리 한다든가, 사물을 주체화, 또는 의인화시킨다든가, 아니면 나(주체)를 객체화(사물화) 시킨다든가, 하는 일들이 모두 어떻게 보느냐와 관계가 있습니다.
느낌과 생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라야 하고, 이렇게 다른 느낌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호소력을 지닐 때, 좋은 시의 몫에 값한다고 하겠습니다.
<추기> 다음은 박시교 시인이 '열린시학' 2003년 가을호에 쓴 '시를 위한 변명' 중 부분이다. 관련하여 자선한 대표작 "전봉건(全鳳健) 추억" 전문을 아래에 싣는다.
말의 홍수시대를 살면서 시마저 길고 복잡(?)하게 써야할 이유가 있는걸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삶의 다난한 이야기를 하면서 군더더기를 철저하게 발라내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시는 짧아야 한다. 그 짧은 행간에 넓고 아득한 그 무엇을 담아내는 일, 그 것이 시가 열어야 할 지평이라고 나는 믿는다.
양평 지나 가산 근처 남한강 가 돌밭// 해오라기 한 마리 긴 목 추스리고 섰다// 강물은 저만한 풍경 위해 천년을 뒤척였으리.// 수면 위로 반짝이며 부서지는 푸른 햇빛// 애초에 그리움은 순간의 꽃이었다// 오석(烏石)에 칼자국 같은 차고 흰 선(線) 한 획.
<추기> 다음은 [현대시]2004년 신년호 '기획특집/ 새 시대 새로운 시인들' 에 실린 정과리의 글 "파열된 연대의 시적 기록, -2004년의 젊은 시인들" 冒頭이다.
2004년 벽두 젊은 시인들의 풍경은 잡동사니들이 굴러다니는 헛간과도 같다. 모가지가 달아난 병, 헌 책들, 용도를 잃은 나무토막들, 해체된 나사들, 그리고 부러진 언어들, 부은 목젖, 갈라진 입술, 뽑힌 혀, 이 모든 것들이 어떤 개별성도 없는채로, 그렇다고, '뭉치면 산다'식의 집단 농성도 아닌 채로, 아주 오래 전에 무너져서 빛까지 우중충한 토막 더미들처럼, 그렇게 시는, 시들은, 시들은 채로, 살고 있는 듯이 보인다. 4중의 고갈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소재의 고갈, 영감의 고갈, 표현의 고갈, 그리고 리듬의 고갈. 이 고갈들은, 실은, 어쩌면, 포만에서, 생각만 해도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물림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추기> 다음은 [현대시]2004년 1월호에 실린 이지엽 시인의 "현대시 창작 강의"의 말미이다. 이미지를 잘 쓰는 것이 시를 완연하게 다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하며 시인이 정리해둔 창작 포인트를 아래에 옮긴다.
1. 이지지의 생명은 명확성과 새로움이다. 모호한 이미지는 오히려 시상의 전개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2. 내 시가 힘이 없어 나약하다면 시각적 이미지로 표출되는 동태적인 장면을 묘사해보자. 더 나아가 청각이나 후각, 근육감각적인 이미지 등을 활용해보자.
3. 내 시가 너무 들떠 있다고 판단되면 동태적인 면보다는 정태적인 가운데 아주 느릿한 움직임들이나 존재하는 것들을 촘촘한 사고로 엮어보자.
4. 시각적 이미지는 집중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하고 청각적 이미지는 분산과 확산의 효과를 나타내는데 적합하다.
5. 한 이미지만을 즐겨 쓰는 것은 시인의 개성일 수 있으나, 그것에 대해 특별한 신념이 없다면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적절히 교차해서 써보자. 훨씬 더 탄력적이고 긴장감이 높은 시를 만들 수 있다.
. 이미지 너머의 것을 생각해보자. 보이는 것의 미세한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너머의 것이 보인다. 보인다면 과감히 잡아라. 보이는 것보다 더 명료하게 그려내라.
<추기> 다음은 정진규 시인의 산문집 [질문과 과녁]에서 따온 글이다.
그냥 보아서는 어렵다 팔색八色조차 우리 눈은 한 눈으로 가려내지 못한다 팔색조八色鳥의 팔색八色은 따로따로 놀지 않는다 이음새가 절묘하다 서로 끌고 당겨서 일색一色을 빚어낸다 조류보호협회鳥類保護協會 회원 이향란이가 가져다 준, 가만히 바위 위에서 졸고 있는, 경남 거제도 동부면 학동리에서 윤무부 새박사가 직접 찍었다는 팔색조八色鳥의 사진을 며칠 들어다보다가 또 한 수手 배웠다 오, 일색一色이여 미인美人이여
-팔색조(八色鳥), 몸시(詩) 별편(別篇)
이 시를 발표한 뒤에 나는 위의 시에 나오는 <이음새>라는 말을 <이음매>로 바꾸어 놓고 있다. 왜냐하면 <이음새>의 <새>라는 말은 아무래도 이어진 부분이 노출된 느낌을 준다. <새>라는 말은 아무래도 <사이>가 축약된 말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음매>의 <매>는 <새>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접미사이지만 훨씬 아름다운 상징성을 음성적으로 내포하고 있으며, 아주 잘 빠진 조화의 실체를 보이기에 그렇게 고쳤다.
<추기> 다음은 [시와 사람] 2004년 봄호에 실린 오탁번 시인의 글중 부분이다.
어떤 하찮은 사물을 보는 순간에도 이상한 울림이 가슴에 와 닿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울림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수첩에다 그냥 몇 자 적어두곤 한다.
짐짓 모른 채하고 내버려두면 이내 잠잠해져서 내가 왜 그런 기록을 했는지 스스로도 땅띔 못할 때가 있고, 그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별별 심상과 이야기로 피어나면서 수첩 속에서 얼른 해방시켜 달라고 조를 때도 있다. 그러나 시 한 편을 쓸 때마다 이것이 나의 絶筆이라는 독한 마음을 먹고 유혹을 뿌리치고 또 뿌리친다.
한 편의 시가 태어나는 과정은 정말 지루하고 괴롭다. 아기를 낳는 산모의 지독한 아픔과 기쁨이 바로 시라는 것을 왜 모르랴.
'杏字板 검자주 옻칠 소반에 정갈한 백자 대접 흰 달 같이 놓이고, 다른 반찬 소용없이 간장 한 종지 앙징맞게 동무하여 따라온 것이, 벌써 마른 속에 입맛 돌게 하는데, 간장 한 숟가락 끝에 찍어 흰죽 위에 떨구어 한 술 뜨면'
-'魂불'에 나오는 흰죽 먹는 장면이라네
말 하나하나 고르며 밤을 밝힌 최명희는
시 짖는답시고 죽을 쑤는 시인보다
정말 진짜 시인이었네
- 오탁번의 시 "시인" 부분
<추기> 다음은 [시작]2004년 봄호에 실린 평론가 정효구의 글 중 부분을 축약한 것이다.
사람은 홀로서기와 함께살기를 같이 한다. 한 사람이 ‘나 자신, 혹은 나 자신의 삶이 진정 자유로운가?’ 라는 질문 앞에서 ‘진정 그렇다’라는 답이 나오기까지 5단계에 걸치는 치유의 방법을, 우리 시단의 현황과 관련해서 말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들 각자가 인간사회 속에서 ‘사회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 카프시, 해방후의 다양한 사회비판시, 민중시, 노동시, 문명비판시 등이 그렇다.
둘째 사회인으로서 홀로서기와 함께살기를 가능하게 한 사람은 그 범위를 넓혀 자연인으로서, 자연생태계 속에서 역시 홀로서기와 함께서기를 가능하게 하여야 한다. 즉 자연인으로서 자연에 지배당하지도, 그렇다고 자연을 침범하지도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자유를 얻고, 자연 속에서 자유를 얻은 다음, 인간은 ‘몸적 세계’ 속으로 자신을 확대하거나 내려 보낼 수 있다. 여기서 몸적 세계란 생의 첫 자리, 다시 말하면 아무런 사회적 의미나 장치가 덧붙여지지 않은 시원의 상태를 뜻한다. 몸적 세계로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알, 밥, 쌀, 자궁, 살 등과 같은 것이 의미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거기에서 시작했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정진규가 그렇다.
넷째 몸적 세계의 차원으로까지 자신을 확대 혹은 침잠시킨 사람이 갈 수 있는 다음 단계는 물질적 세계로 그 자신을 들여놓는 것이다. 물질적 세계로 가면 모든 존재는 해체되고 뒤섞인다. 여기서 개체는 무의미해진다. 처음도 끝도 이곳엔 없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 뿐이다. 여기선 어떤 화학작용도 다 일어난다. 그러므로 무엇이 될 가능성은 무한대이다. 나는 무엇이 될 수도 있고, 개체와 개체 사이의 경계는 무화되며, 나는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현상계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나온 것이다.
다섯째, 마지막으로 도달할 수 있는 세계는 현상계를 넘어선 ‘虛’‘空’‘無' 와 같은 세계이다. 이것은 실제하는 세계도 아니며, 있거나 없는 세계도 아니며, 현상계의 언어로 설명하기도 어려운 세계이다. 無邊의, 無限의, 無形의 이 세계 속으로 발을 들여놓으면, 우리는 진정 현상계의 그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자유인으로서 홀로서기를 할 수 있다. 최승호의 시집 ’달마의 침묵‘에서 이 단계에 이르려는 노력이 보인다. 그는 전술한 다섯 단계를 다 탐구해본 시인이다.
<추기> 다음은 [시작] 2004년 봄호에 실린 평론가 유성호의 글 중 부분을 축약한 것이다.
교과서를 통한 문화전수 행위나 우리 문화의 전통수립 작업에서 배제되어 왔던 타자를 일별하면
1) 종교적 상상력, 이를테면 영원에 대한 추구, 신성의 지상적 복원에 대한 의지, 초월의지, 영성에 대한 내밀한 감각과 그것의 추구, 사랑의 구현, 그리고 모든 불가시적 세계에 대한 見者로서의 역할을 자임하는 지향성 등,
2) 몸의 발견과 해석
3) 아방가르트 미학, 이를테면 李 箱, 초현실주의 지향, 모더니즘의 가장 진보적인 형식, 해체지향의 시학,
4) 노동시와 민중미학
5) 대중 친화력의 시 등이다.
<추기> 한명희 시인이 여러 문인들과 인터뷰한 글을 모아서 책(삶은 조심스럽게 문학은 거침없이)을 냈다. 다음은 천양희 시인과 인터뷰한 내용 중의 부분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저도 시를 잘 쓸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을 “시를 쓸려는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싶으세요?”로 바꾸어 물었다. 그녀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거나 강연을 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찢어버리라는 말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꼭 하루살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고 했다. 하루살이는 물속에서 천일을 있다가 스물다섯 번 허물벗기를 한 후 태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꼭 하루를 날고 짝짓기를 한 후 죽는다고 한다. 하물며 하루살이가 이러한데 문학작품이 태어나는 과정이 어떠하겠는가. 그녀는 문학을 쉽게 보려면 차라리 연예계로 가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요즘 학생들이 시 보다는 영화나 광고쪽 일을 더 하고 싶어하는 세태에 대해서 나름대로 진단을 내렸다. 그녀는 좋은 글을 쓰면 먹고 살아진다면서, 잘 산다는 건 “정신 있게 사는 것”이라고 부연설명 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옛날 선비잖아요? 선비가 장사꾼 보다 못하면 안 되잖아요” 라고 말했다. 좋은 시에 대해 묻자 그녀는 공감을 주고 감동을 주는 글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시에 순정을 바치면 정말 좋을 시를 쓸 수 있다고, 운명을 걸고 써야 한다고 말했다.
<추기> 소설가 김현이 'TV 책을 말하다'에 나왔다. 화제는 그의 소설 "현의 노래" 였다. 받아 쓴 것은 아니나, 대담 내용 중 일부를 줄여서 적어둔다. 치열함에 대하여 생각하게 하는 말들이다.
- 나는 "칼의 노래"와 "현의 노래"를 쓰면서 이빨 8개를 뽑았다. 몰아서 쓰다보니 이빨들이 들솟았다. 빼서 쓰레게통에 버리면서 썼다.
- 나는 많은 작품을 쓰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 아마 두세 편, 또는 단편을 포함해서 다섯 편쯤 글을 쓸 것이다. 그 다섯 편을 다 쓰고 나면 자연사 할 것이고, 아니면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는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당대에 이름을 날린다거나,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그 두세 편 (또는 다섯 편)의 작품을 쓰는 일에는 관심이 있다.
- 전작인 "칼의 노래"의 문장은 칼의 이미지에 걸맞게 짧고 날카롭더니 이번 "현의 노래"의 문장은 거문고의 이미지에 걸맞게 유현하고 음악적이었다는 한 평론가의 지적에 대하여 그가 대답했다 "저는 문장의 리듬을 정하지 못하면 글을 쓰지 못합니다"
<추기> 다음은 [열린시학] 한국 젊은 시인상.작가상 예심평이다. 본심 해당작이 없다
오늘날 우리를 둘러싼 문학의 담론은 큰 줄기를 잡기가 어렵다. 지극히 사변화되고 말초화된 실뿌리가 모래밭에 위태롭게 심어져 있는 형국이다. 속도와 죽음과 욕망의 화두에 얽매이면서 극심한 개인주의로 매몰되고 있다.문학적 상상력도 실종되고 있다. <한국의 젊은 작가상. 신인상>은 당초 이러한 한국의 문학적 풍토를 일신하고자 하는 젊은 문학도를 발굴한다는 취지 아래 제정되었기 때문에 보다 새로운 패기와 도전정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응모된 작품들의 수준이 기대에 못미쳐 본심에 회부하지 않기로 했다. 기존의 문학적 사고를 답습하여 어느 정도의 적당한 실력만을 갖춘 적당한 인재를 발굴하는 것은 오히려 이들의 안일함을 부추기는 경과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추기> [생각과 느낌] 2004년 여름호에서 인용한 '마광수 문학론집' 중 '평폐론(評弊論)의 부분을 옮긴다.
요즈음 비평가들에게는 심금을 울리는 문학적 감동이란 우스운 것이고, 어떤 기발한 문체, 신기한 사건의 전개, 이상심리적인 주인공의 변태가 더 재미있고 가치가 있다. 그럴듯하게 수식해 놓은, 평론에는 도무지 맞지 않는 번드레한 문체가 이제는 우수한 평론 문체가 되어 버렸다. 평론은 실로 이제까지 가졌던 문장정신의 예언자로서의 고매한 영역을 떠나 언어적 유희로서의 상완(賞翫)의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평론 자체로서만 끝나면 괜찮겠는데, 그러한 평론들은 스스로의 궤변을 계속 고집해 나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 폐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창작가들은 자연히 종당에는 평론가들의 눈치를 살피기 마련이며, 그러한 터무니없는 문학적 가치기준 위에서 글을 쓰게된다. 그릇된 평론이 문학 자체와 독자들에게 주는 해는 보통 생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