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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창작론] 시상의 포착과 영감

가마실 / 설인 2011. 3. 20. 16:21

[시창작론] 시상의 포착과 영감


3) 두 가지 형태의 시작

흔히 작품을 쓸 때 전적으로 영감에 힘입어 창작하는 시인의 경우와 자기의 예술적인 지적 의식에만 의존해서 쓰는 경우의 두 종류로 분
류한다. 모리스 보우라는 전자의 대표적인 시인을 셸리 블레이크로 꼽았고, 김춘수는 전자와 같은 시인으로서 R. M. 릴케를 들고 있다. 박정만도 영감에 의존한 시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사랑의 앵화도화 울밑으로 시들어지고

먼 산허리에 기우는 봄빛,

엉터리로 불러보는 아득한 그대,

막차의 불빛으로 자옥하게 피어난 그대.

이 봄빛 다하면 저승꽃만 착실히 피리.

 

박정만은 이 작품 말미에 탈고한 시각을 기록하고 있다. 즉 1987년 9월 4일 새벽 5시 10분이라 밝히고 있는데, 바로 앞서 탈고한 작품은
<서러운 각시>로 동일하게 부기된 시각은 1987년 9월 4일 새벽 5시라 써놓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10분만에 구상하고 창작 탈고한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의 시집『서러운 땅』에는 짧은 시간에 창작한 작품들이 상당수 발견된다. 그리고 서문에 1987년 8월 22일부터 9월 5일 사이에 280편의 시를 얻었고, 정신도 없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따라 쓴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작품 말미마다 탈고의 시각을 기록했다. 박정만이 남긴 말을 믿고 기록들을 존중한 다면, 그리고 일반적으로 작품 한 편의 창작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되는 것을 고려하면, 그는 영감에 따라 시를 창작한 시인의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한편 김춘수는 지적 의식을 강조하고 영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시인으로는 폴 발레리를 들었다.28) 발레리는 시를 정신의 노작이라 생각했고, 그에 대하여 김춘수는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지성의 많은 노력을 가장 소중히 여긴 사람이라 하기도 했다. 옥타비오 파스도 두 타입의 시인을 가정하고 있다. 영감을 믿는 시인과 영감을 믿지 않고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시를 쓰는 사람이 그들이다. 
 이제까지의 논의한 전자에 해당되며 영감에 따르는 방법은 시창작의 한 형태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것의 연장에서 시인의 성격을 두 가지로 분류30)하기도 한다. 영감에 따르는 형태는 치밀한 계획에 따라 시를 쓰는 타입보다 훨씬 유서 깊은 내력을 지니고 있는 성격으로서 신들린 시인관이다. 시인은 일종의 예언자로서 신의 영감을 받으며 뮤즈나 신이 그의 입을 통하여 얘기하는 매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을 장인이나 기술자로 파악하는 시인관이다. 후자는 시를 제작할 당시나 후에도 자신이 하는 작업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에 의해서 작품을 다듬고 세련시키는 경우이다. 여하튼 전자와 같은 인식은 오랜 역사에 걸려 있다. 또 근대적 변용을 거치면서 낭만주의 시대에는 지배적인 세력을 형성하기도 했고 현대까지 시인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방법으로서 그 중요성은 인정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플라톤을 비롯한 이들의 주장을 존중하더라도 전적으로 동의 할 수만은 없다. 시인은 신의 계시를 받아 쓰는 사람이거나 대필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단지 수동적인 상태에서 영감만을 기다리지 않고 능동적으로 창조행위에 나서기 때문이다. 신의 계시를 받은 것같은 어떤 느낌이 없다고 하더라도 시인의 창작은 가능하고, 영감 없이도 시를 창작하는 행위가 얼마든지 있다.
 이는 영감을 받기 전에는 시를 창작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한 적절한 반증이 될 것이다. 또한 감정의 남용이 시가 될 수 없으며 이성의 기능을 배제하고 시가 성립될 수 없음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핀 바와 같다.
앞의 언급처럼 시인을 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시인을 장인이 나 기술자로 파악하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장인이나 기술자는 작업을 하기 이전에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 일을 한다.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작업의 목적이나 작업하는 이유를 알고 있으며 차후 일의 진행이나 최종의 결과를 결코 잊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작업을 종료하고서 도 처음의 의도나 계획에 따라 일이 수행되었는지 검토하고 다시 자신의 작품을 다듬고 보완한다.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의지에 따르며 의식의 지배하에 시를 창작하는 이러한 시인은 시인을 신들린 자로 바라보는 시각과는 상대적인 관점이다. 시인을 보는 관점과 시각을 시창작에 적용하면, 이와 같은 시작은 영감에 따른 시작이 아니라 계획과 의식에 따른 시작이며, 시인 스스로의 의지에 따르고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힘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시창작형태이다. 
 영감을 믿지 않고 미리 그려놓은 계획에 따라 쓰는 시인은 아무것도 우연에 맡기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각각의 이미지를 자명한 원리에 따라 필연성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쓴다. 원재료를 소기의 계획에 종속시키고 리듬과 통일성을 유지한다. 리듬을 살리기 위해 낱말을 반복하기도 하고 때로 비약을 위해 생략하기도 한다. 지적 의식으로 문장의 짜임새나 전체 시상을 조직하고 구조화한다. 
 그들에게 시창작은 이지적 노동이다.
노동의 과정에는 논리에 입각하며, 온갖 지혜를 동원하고, 자기 억제와 작업 이지는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인간정신의 지적 운동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며 작업이성을 도구와 수단으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자연과 생활이 제공하는 모델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목적과 가치를 둔 시인이라면 있는 그대로를 가감없이 재현
해야 할 것이다.  또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꾸밈없는 사람들의 삶과 모습,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문제와 비극, 눈앞의 충격적 현실에 대한 고발이나 비판을 염두에 두었다면 현실과 거리를 두기도 하는 영감을 부정해야 할 것이다. 이 경우 주관적인 인간 감정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시를 맡기지 않고 객관적 관찰을 강화해야 하고 분명한 의도와 치밀한 계획이 선행되어야 한다.

출처 :  http://cafe.daum.net/pen063

 

 

 

 

출처 : 박종국 수필가의 일상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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