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지도(地圖)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내려, 슬픈 것처럼 창 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로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내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나서면 일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내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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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고백체 예술이든지 그것은 끊임없는 고뇌와 자기 폭로의 열정이 동반될 때 가능하기 마련이다. 윤동주는 우리 시사(詩史)에서, 서정시가 고백체 예술의 가장 대표적인 양식임을 그 누구보다 진정성 있는 언어로 보여 준 시인이다.
물론 그런 그도 구체적 사랑의 흔적을 고백한 일은 좀처럼 없다. 오히려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바람이 불어)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윤동주 시편에서도'순이'라는 여인이 세 번 모습 드러낸다. 그녀는 '사랑처럼 슬픈 얼골 아름다운 순이의 얼골'(소년)이라든가 '순아 너는 내 전(殿)에 언제 들어왔던 것이냐?'(사랑의 전당) 등의 진술을 통해 그의 시편에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슬픈 얼굴을 하고 사랑의 전당에 들어왔던 그녀가 이제 '잃어버린 역사(歷史)처럼 홀홀이' 시인을 떠나고 있다. 방 안에까지 눈이 내리는 듯한 함박눈의 환각 속에서 그녀는 떠나고, 시인은 '너는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이제 눈이 녹으면 그녀가 남긴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필 것이고, 시인은 그녀의 발자국을 그리워하면서 그 사랑과 이별의 기억을 내내 간직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별의 불가항력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오랜 기억 속에 간직하려는 상상적 행위가 이 시의 모티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싸늘하게 옥사한 후 나온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1948년)가 올해로 회갑을 맞았다. 하지만 연희전문 38학번 청년 윤동주는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사랑스런 추억)라는 자신의 예언처럼 불멸의 청춘으로 남아, 우리로 하여금 잃어버린 사랑과 젊음의 마음을 항구적으로 탈환케 하고 있는 것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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