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詩) 감상

능소화 편지/ 허영숙

가마실 / 설인 2010. 10. 3. 17:04

능소화 편지


허영숙


꿈결인가, 그대를 만난 것이

단 한 번 본 것뿐인데

허락도 없이 들어앉은 그대를 쫓아

일생을 소진하며 여기까지 왔다

잠깐 스치고 오래 헤어져 있었으니

그리운 문장들만 넝쿨을 이루고 자라

담벼락이 환하다


그대 발소리는 멀고

그 소리 담으려 나를 더 크게 열어

한 잎 귀 넓은 꽃으로 핀다

한여름 땡볕을 딛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이 지독한 흡착은

그대가 일생에 또 한 번 이 길을 지나 갈 때

꽃 무더기에 숨은 나를

모르고 스쳐갈까하는 염려 때문이다


먹구름을 밀며 하늘이 뒤로 숨고

그대와 나의 먼 행간에도 빗방울이 든다

간당간당한 꽃대를 아프게 움켜쥔다

이토록 간곡하고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뼛속까지 훑고가는 소나기가 내리기전에

내가 먼저 나를 놓아버릴 것이다


-----------------------------------------------------------------


능소화는 고급스러우면서도 외로운 꽃이다.

양반 집 귀수를 닮은 꽃이면서도,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꽃이다.

차마 대문 밖에 나서지는 못하면서도, 마냥 세상을 그리며 먼 동구밖을 바라보는 꽃이다

능소화에서는 외로움이 쫙쫙 흐른다.

그러면서도 내식도 못하는 미소만 지니고 하루 종일 담장에 매달려 있기만 한다.


시적 화자는 "꿈결인가, 그대를 만난 것이/ 단 한 번 본 것뿐인데" 마음을 빼앗기고 잊지 못 하고 있다.

분명리 그녀(능소화)는 주인이 있는 몸이다. 아무도 근접할 수 없는 근엄함과 정숙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한 번도 크게 웃거나 소리내지 못하는 아낙이었을 것이다.

화자는 "허락도 없이 들어앉은 그대를 쫓아/ 일생을 소진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고백한다.

사랑은 윤리를 뛰어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 규수에게 함부로 말 건넬 수도 없고, 속으로 마음을 태우고 있다.


능소화는 무더운 여름에 핀다. 뜨거운 태양을 머리에 이고

줄기에 치렁치렁 매달려 가슴에서 이는 열정을 태우며 살고 있다.

"한여름 땡볕을 딛고 담장을 타고 오르는/ 이 지독한 흡착은" 화자를 미치게 한다. 능소화를 바라보면 가슴이 탄다.


친구인 주인 나리와 평상에 앉아 안방 마님(능소화)가 내다 준 주안 상을 받고 거나하게 술을 마시고, 흥겨운 시조를 읊으면서 집안을 흘깃흘깃 엿보지만 마님(능소화)은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담벼랑에 매달린 능소화를 다시 본다 "간당간당한 꽃대를 아프게 움켜쥔다/ 이토록 간곡하고도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어쩌나, 술 기운이 가슴을 차고 오르고 온 몸은 능소화처럼 붉게 탄다.

잠시 후에 소나기가 한 줄금 내일 것 같다.

"뼛속까지 훑고가는 소나기가 내리기전에/ 내가 먼저 나를 놓아버릴 것이다" 어서 서둘러 이 집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집에서 죽어 시체로 나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