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詩) 감상

'즐거운 편지' / 황동규

가마실 / 설인 2010. 10. 3. 17:00

 즐거운 편지




황동규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1958년 월간 『현대문학』 등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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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찰라적인 이벤트이거나

청춘을 건너는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되어지는 현대에 와서도

이 시는 왜 뭇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일까

눈보라가 치는 강변이나 노을빛의 쪽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풍경을 건너본 적이 있는가. 모든 것이 잠든 어느 적막한

시간에 누군가 한 사람을 절실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일이란

사무치는 일이다. 뼛속까지 사무쳐야 하는 일이다.

채워지지 않는 부재와 상실을 기다림으로 참아내야 하는 일이다.

밤이 되면서 청춘의 골짜기에는 다시금 눈발이 퍼붓기 시작하고,

폭설이 멈추는 어디 쯤에 우리들의 부질없는 사랑도 그칠 것을 믿는다.

바람처럼, 눈발처럼,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은 흔적도 없으리

그러므로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하는 그런 사소한 날에도 우리 모두는

잇닿은 기다림을 밤새도록 불러내어야 하리 (양현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