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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의 발상과 전개방(2)

가마실 / 설인 2011. 3. 20. 16:40

 

시의 발상과 전개방(2)


저번 주 강의 말미에 인용한 임보 시인의 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 상상적 이미지 즉, 사물(현상)에 내재되어 있는 이미지를 찾아내는 작업이 시이다.
* 영감은 어느날 문득 나에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찾아내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상적 이미지라는 것과 영감은 서로 일치하는 부분도 있고 성질이 다른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내재되어 있다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 이건 좀 복잡한 문제입니다. 철학적인 논쟁거리도 되기도 하지요. 어떤 이미지가 본래부터 그 사물 속에 있는 것이냐 아니면 이성과 같은 주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냐 하는 논쟁은 오늘날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이나 구조주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통해서도 지속되고 있는 형편이지요. 한 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상상적 이미지는 창조의 작업입니다. 사물 속에 본래부터 있었거나 아니거나 간에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통념적 인식을 거부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다시 임보 시인의 글을 읽어 보기로 할까요

흥겹고 재미있게

- 임보 (시인, 충북대 교수)

하나의 시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시의 씨가 있어야 한다. 그 씨를 詩想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이는 靈感이라는 신비로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흔히 쓰는 말로 이미지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나의 경우 이 이미지는 새로운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서 많이 얻어진다. 그래서 여행은 나에게 시의 씨를 얻는 좋은 방편이 된다. 이 글에서는 졸작 <영산홍>과 <꽃방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가를 들춤으로 내 시 쓰는 습성의 일단을 보이고자 한다.

*
어느 해 봄의 일이다. 학생들이 졸업여행을 떠나던 날 강의를 쉬게 되어 나도 어디든 잠시 다녀오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계룡산 남쪽 골짝에 자리한 동학사였다. 진달래는 이울고 철쭉이 피어날 무렵이었다. 평일이어서인지 절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많지 않았다. 한적한 계곡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혼자 기어올랐다. 동학사 어구에 있는 길상암이라는 작은 암자 가까이 이르렀을 때의 일이다. 주위의 산천이 마치 저녁놀에 젖듯 환하게 밝았다. 무슨 연고인가 하고 주위를 살펴봤더니, 길상암 뜰에 한 그루의 거대한 꽃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온몸으로 수 만개의 꽃봉오리들을 밀어올리고 있는데 마치 이글거리는 모닥불같았다. 영산홍(暎山紅)이라고 했다. 평소에 작은 영산홍만 보아왔던 내게는 무척 낯설고 여간 경이로운 일이 아니었다. 꽃이 아무리 곱다기로소니 천하에 저렇게 황홀할 수가 있단 말인가. 온 산천에 울긋불긋 피어난 철쭉들이 다 이놈의 꽃그림자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놈에게 한동안 정신이 팔려 멍청히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다리마저 후들거리는 것 같았다.
영산홍 구경을 한 뒤 길상암 입구의 돌계단을 다시 내려오는 도중이었다. 문득 하나의 섬광이 나의시선을 붙들어 잡았다. 한 여승이 나를 올려다보며 잔잔히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길가에 책상을 내다놓고 앉아서 기왓장 시주를 받고 있는 비구니인데 스물 한, 둘쯤 되었을까, 바로 그 섬광은 옥처럼 맑은 그녀의 얼굴에서 반짝이는 영롱한 눈빛이었다. 선녀의 아름다움이 아마 저러하리라. 그 여승의 신묘한 아름다움은 조금 전까지 영산홍에 사로잡혔던 내 마음을 단숨에 앗아가 버렸다. 세상에 저렇게 눈부시게 고울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터벅터벅 동학사를 오르는데 절은 보이지 않고 그 여승의 얼굴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왓장 시주라도 하면서 몇 마디 얘기라도 건네볼 걸...... 생각이 이에 미치자 절구경은 안중에 없고 마음이 급해졌다. 절의 책방에 들러 김달진의 <산거일기> 한 권을 사들고는 서둘러 경내를 돌아 부랴부랴 다시 내려왔다. 시주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였던가 길상암의 그 여승은 자리를 거두고 막 일어서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인 일인가. 지금의 얼굴은 조금 전의 그 여승의 것이 아니었다. 볼 옆 비스듬히 칼자국인 듯 싶은 큰 흉터가 끔찍스럽게 이 여인의 얼굴을 갈라놓았다. 선녀는 간 곳이 없고 흉칙한 한 여인이 주섬주섬 그 자리를 거두어 총총히 절 안으로 사라진다. 이 무슨 변고인가. 마치 도깨비에게 잠시 홀렸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절을 내려오면서 내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부처님의 어떤 조화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꽃에 흠뻑 빠져 정신을 잃고 있는 나를 보고, 세상에는 그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느니라 하고 슬쩍 보여준 것이 아마 그 여인인지 모른다. 그래 이젠 그 여인의 아름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불쌍한 내 몰골을 보고, 네가 지금 마음 빼앗기고 있는 그것의 진면목은 사실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이렇게 흉칙스러운 것이니라 하고 다시 일깨워 주려는 그런 의도였던 것은 아니었는지......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날 저녁 밤잠을 설치며 써 내려간 것이 <영산홍>이다.

<영산홍>

동학사 아랫절
길상암 뜰에
흐드러진 영산홍
온산천 태우는데
고놈보다 더 고운
사미니(沙彌尼)* 한 년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섰다가
달려나온 돌부처에
귀잽혀 가네

* 사미니 : 불도를 닦는 스무살 이하의 어린 여승

제 6행까지 내가 본 영산홍과 여인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그린 것이다. 그런데 그 여승의 변모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한참 궁리타가 위와 같은 극적 구성으로 엮어보았다. 가만히 세속을 엿보고 서 있는 사미니를 깜짝 놀란 돌부처가 달려나와 귀를 잡고 끌고 들어가는 장면으로 만든 것이다. 여승의 불가사의한 변모를 돌부처의 의인화로 대치했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내가 겪었던 정황과는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작품이 완성되지 않더라도 별로 아쉬워하지 않는다. 체험과 작품을 반드시 일치시킬 필요는 없다. 체험보다는 상상력을 따르는 것이 더 아름다울 수 있으니까.

- 시창작 이론과 실제, 시와시학사 380쪽에서 382쪽

여행 - 동학사 (길상암) - 영산홍을 보다 - 사미니를 만나다 - 새로운 확인(부처님의 조화)
시인은 첫번째로 거대한 영산홍 나무를 봅니다. (경이로움: 작은 영산홍만 보던 통념으로부터의 변환)
두번째로 시주를 받는 사미니를 봅니다. (영산홍의 아름다움에 빠져 매우 아름다워 보입니다)
세번째로 다시 사미니를 봅니다. (흉칙한 얼굴입니다)
여기까지는 사실적 체험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얻어들여지는 자각은 부처님의 조화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연스럽게 부처님의 조화를 이야기했지만 꽃에 취한 나에게 꽃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첫번째 사미니를 보여주고, 그 아름다움에 다시 빠져있는 나에게 두번째 사미니를 보여주고 이 세상의 참 모습은 저렇게 흉칙한 것이라고 일러준다는 생각은 불교 교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공부가 있지 않고는 일으킬 수 없는 생각인 것입니다.
불교에는 二諦法 이라는 것이 있지요. 우리가 알고 있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걸 한 번 생각해 볼까요. - 색이 공이고 공이 곧 색이다. 여기에서 색이란 延長을 가진 물체를 뜻하지요. 불교의 교리는 부정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용납하고 있는 진리를 부정하기 위해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은 덧없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덧없는 것이 진리라고 또 그것에 집착하면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공허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그 진리를 부정하고 그 부정된 것을 또 부정하고...... 참다운 진리는 그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은 이 세상의 재물을 모두 다 가지려는 듯이 남과 끊임없는 경쟁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영원한 승자가 있을 수 있습니까? 물욕에 집착하다보면 다른 사람을 다치고 종국에는 자신의 마음도 노예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색은 곧 공이다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공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 생활은 말 그대로 허무한 상태에서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모든 것은 다 그저 흘러가는 것인데, 내일 죽을 지 모레 죽을 지 모르는 목숨인데 일해서 무엇하며, 밥은 먹어서 무엇합니까? 사는 날까지는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느 일변에 치우치지 말고 중도를 행하라 이렇게 이야기하면 될까요? 얘기가 옆길로 샌 것 같은데, 영산홍과 사미니의 바라봄에서 이러한 부처님의 조화를 알게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새로운 체험(시상)을 얻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데, 그 새로운 체험이라는 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시각, 주장 이런 것들이 전제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 단순히 그 여행 자체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초심자들은 위와 같은 체험을 그대로 글로 옮기려 합니다. 초심자뿐만 아니라 기성 시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체험을 그대로 옮기는 작업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것은 사실의 전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버무린다'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체험의 양상을 나의 주관과 버무리는 일, 시 한 편에 나의 인생관이나 인식이 맛이 골고루 배도록 하는 일이 좋은 시를 쓰는 일의 시작입니다.
그림 그리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 평화로운 농촌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경화 한 폭이 있습니다. 그림을 보고 여러분들이 떠올리는 하나의 이미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어떤 정감이 있다면 그림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여집니다.
<영산홍>이라는 시는 시인이 체험한 사실을 그대로 보여주거나 어떤 주장을 펼치지 않습니다. 진행되고 있는 상태, 한 폭의 그림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쓰는 일을 정의합시다.
시인이 설명한 여러 정황들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영산홍을 보았을 때의 경이로움도 사미니 아름다움과 흉칙함의 교차도 시에는 나타나지 읺았습니다. 영산홍과 사미니의 아름다움의 대비 속세를 훔쳐보는 영산홍과 사미니를 잡아 끌어가는 돌부처의 등장은 매우 상징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를 자세히 읽어보십시오. 영산홍이 아름답다라든가, 사미니가 아름답다라는 표현은 어느 한 구석에도 없습니다. 온 산천을 태우는 영산홍과 그 보다 더 고운 사미니 영산홍이라는 꽃을 보았거나 보지 않았거나 이런 대비법을 통하여 영산홍과 사미니의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지 않습니까?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있다는 표현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순진무구함? 철없음? 하여튼 시인이 인식한 부처님의 조화는 이 시 속에서 돌부처를 통해서 스케치하듯 드러날 뿐 힘주어 자신의 지식을 뽐내거나 영감을 과장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체험을 재구성하는 것!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생자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녹여내는 것!
여기에서 아마튜어 시인들의 작품을 통해서 이 문제를 다시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용시 1>

청호동 갯배

상한 물 위라도 건너야할
강은 깊었노라고

청호동에 모여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뱃사공이 되어
업보의 줄을 당긴다

반생을 저린 오금에 눌려 살아도
고향은 끊어진 탯줄
기워도 구멍만 커지는
잘못 꿰맨 그물코

청호동에 오르면 버릇처럼
고향을 묻는 사람들
이제 와서 고향이
무어 그리 대단할건가

수전증에 떠는 세월
이승을 버리고 있을 피붙이들

갯배에 오른 사람은 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이미 아픔이 아니란 것을

* 갯배: 속초시 중앙동과 청호동을 잇는 나룻배. 갯배는 승선한 사람들이 갈구리 철선을 당기어야 이동한다. 이 고장이 수복된 이후로 고성군 봉수리(현재 북한)에서 남하한 조막손이라고 하는 김씨 노인이 20명쯤 탈 수 있는 갯배를 만들어 청호동과 중앙동 사이를 잇는 교통수단으로 배삯을 받았던 것이 청호동 갯배의 효시다.

<인용시 2>

갯배를 타다

뽀얗게 분칠한 오징어 몸통을 씹으며
비릿내나는 물속
애증처럼 질긴 쇠줄 늘어뜨린 갯배를 탄다
검은 얼굴의사내는
제 발뿌리만 쳐다보며 배를 밀고 있다
고집센 노파처럼
수 만 번도 더 내디뎠을 물에 든
바닥 위를
갈고리에 당겨졌다 놓여지는 꿈
세끼니 힘껏 목숨줄을 당기면
얼마치 삶의 길이 지나질까
그의 마른 팔뚝에서 바닷물이 꿈틀댄다

위의 시들은 갯배라는 공통된 소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속초로 여행을 갔다가 갯배를 타게되는 경험을 가지게 되었나 봅니다. <인용시 1> 말미에 주석이 붙어 있지요. 갯배의 내력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이 잘 되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 두 편의 시를 자세히 분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색다른 경험을 가지고 시를 만들어 갈 때 앞서서 말씀드린 체험의 직설적 토로를 억제하고 그 체험을 재구성하여 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편의 시는 갯배라는 소재를 공통적으로 다루면서도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매우 상이합니다.
우선 <인용시 1>에서는 청호동이라는 특수지역- 실향민촌-과 고향을 잃고 사는 실향민들의 집단적 애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애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익숙해져버린 테마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까요? 시의 초점이 확산되어 있어 주제가 너무 손쉽게 드러나 버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지요? 예술행위는 주어진 현실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반응하기는 하지만 정치적인 활동이나 경제적인 활동처럼 직접적인 반응이 아니라 감성적 반응, 말하자면 미적으로 승화된 변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학을 이야기하자면 너무 광역화되는 느낌을 갖게 되는데, 이를테면 모든 예술행위나 작품에는 미적인 요소가 반드시 함유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산홍>에 드러난 바와 같이 사미니가 절문 뒤에 숨어서 웃는다는 상황은 다각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속세에 대한 그리움이나 동경을 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언제 웃게 될까요?
<인용시1>은 집단적 상황을 이야기하지만 시를 쓴 작자의 생각의 버무림이 보이지 않아 감동의 폭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갯배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았는데 이 또한 시 속에 갯배에 대한 묘사를 자연스럽게 설치하여야지 주석을 따로 떼어놓고 보면 독자들에게 고정된 관점에서 읽어 달라는 주장(?)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인용시2>는 작자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와 사공 노인으로 좀 더 현실감있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 속에 갯배의 정의(애증처럼 질긴 쇠줄 늘어뜨린 갯배)를 삽입하고 실향민의 슬픔을 배제하고 오직 가난한 한 노인의 반복되는 노동(갯배를 움직이는)의 현장을 묘사하므로서 훨씬 시적 재미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요약하면 한 편의 시에서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말고 이야기를 집약하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시를 읽는 독자가 매우 높은 안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내가 처음 <갯배>를 탔다는(발견) 사실이 나를 흥분하게 하지만 나보다 갯배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자연히 설명적인 부분은 배제되겠지요. 나보다 더 많은 정보와 해석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렇다면 나는 <갯배>의 무엇을 보여주어야 할까요? (여기까지 생각하니 식은 땀이 절로 납니다)

다음에 다룰 시를 읽어 볼까요

<인용시3>

빗물에 젖은 눈

아침에 나부끼는
바람소리에

몸 실은 저 물방울
뭘 말하는 지

싸늘한 가을 거리에
흐르는 비바람 맞으며

나의 눈물은 젖어들고
낙엽은 애써 땅에 흐른
눈물 닦으려 이렇게 바람에 몸을 실어

파란 새벽에 날 찾아와
야윈 눈물로 떠나버린 너

빗물이라도 내 맘을 아는 지
촉촉히 젖은 내 눈 닦아

소설과 시의 극명한 차이점은 사건의 전개와 사건의 전개에 따르는 시,공간적 넓이에 있습니다. 소설은 어떤 사건에 연루되는 주인공의 행동을 통해서 인과관계가 형성되고 작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뚜렷한 반면 시는 구체적 사건의 한 단면을 절개하여 보여주는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압축이란 깡통을 우그려뜨려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우그려뜨리기 전의 깡통은 깡통안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는데 우그려뜨리는 순간 그 공간이 사라져 버리지요
우그려뜨려짐으로서 그 깡통의 내력 또한 압축되어지고 맙니다. 무엇인가가 담겨져 있었는데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요. 알 수 없음으로 파생되어지는 수 많은 생각들......
시는 그 수많은 생각들을 유발시키는 행위입니다. 말하자면 구체성을 은폐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그 구체성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에도 구체적인 경험 즉 이야기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구체적 경험의 이야기는 읽는 이들에게 좀 더 개연성있는 설득력을 확보하게 하여 줍니다. 어디까지 압축해야 하는가?
<인용시3 >은 비오는 가을날의 정경을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낙엽이 시나브로 구르고 내 곁을 떠난 사람 때문에 눈물이 흐르는데 그 눈물은 스산하게 바람이 몰고 온 빗물과 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게 되는 사랑의 부재와 이별 이런 것들을 감수해야하는 고독한 한 사람의 내면풍경을 그리고 싶은데 어떤 구체적인 정황이 결여되어 있어 글쓴이의 발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지 못하고 어색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연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연의 나눔은 장면의 전환과도 같은 것입니다. 앞 연과는 차별되는 비약일 수도 있고요. 바람 소리에, 뭘 말하는 지, 비바람 맞으며, 몸을 실어, 내 눈 닦아 등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동작의 연결이 지속되어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루한 느낌을 갖게 합니다. 굳이 연으로 나누고 싶다면 첫 번 째 연에서는 어떤 내용 2연에서는 어떤 내용....식으로 구성을 해 보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 드리겠습니다.
시는 나에게 절실한 어떤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미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는 것!

다시 임보 시인의 글로서 강의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나는 시도 소설에 못지 않게 읽어서 즐거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가장 큰 요인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들이 읽히기를 바란다면 우선 재미있게 쓸 일이다. 나는 시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주로 두 가지 장치를 선호한다.
첫 째는 가능하다면 운율에 싣고자 한다. 가락은 시를 흥겹게 한다. 같은 내용이면 가락에 실어 표현하는 쪽이 보다 효과적이다. 운율은 시를 시이게 하는 원초적인 시적 자질인데, 요즈음의 자유시들 가운데는 아예 운율을 회피하려는 경향도 없지 않다. 이는 운율을 시의 구속으로 잘못 판단하고 있는 때문으로 보인다. 운율은 시의 장애물이 아니라 독자의 흉금을 흔들 수 있는 무기다. 음악의 가락이 얼마나 놀라운 힘을 지니고 있는가만 보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에는 시의 형식 곧 시의질서가 있다. 결코 무질서한 글이 아니다. 자유의 이름으로 질서를 깨드린다면 이는 방종에 불과하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시의 질서를 지켜 글을 쓰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운율은 시에 질서를 부여하는 중요한 장치의 하나다.
둘 째는 시의 내용을 구상화하는 일이다. 달리 말하면 스토리화한다. 흥미를 유발하는 소설적 요소를 시에 끌어들인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을 담은 시는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오래 기억에 남는다. 산문체의 긴 시에서는 물론이고 나는 짤막한 단시 속에서도 즐겨 얘기를 담는다.
그러면 시가 흥겹고 재미만 있으면 다 되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재미있는 소설이 다 훌륭한 소설이 될 수 없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시의 품격은 사람의 체취처럼 시인의 인품에서 자연히 스며나온 것이므로 억지를 부려 얻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시인을 구도자의 반열에 앉히고자 한다. 사실 시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출처 : 박종국 수필가의 일상이야기
글쓴이 : 박종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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