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벌자/길떠나기(국내)

수덕사 2009. 9. 6

가마실 / 설인 2010. 8. 8. 20:33

 

 

            청춘에 들렀다가 25년만에 찾은 수덕사/2009.9.6

           마치 동화 오세암의 배경과 흡사하여 발길을 잡았던 곳----

          암자는 한 채뿐이었는데 현대식 건물이 아래로 들어서서 씁쓸  

 

    고암 이응로 화백 머문 곳- 버림받은 조강지처의 애환이 서린 곳

           견고하고 완고한 돌담 안에는 여승들의 안식처.

           태울 청춘이 있던 시절 훌훌 털고 들어가고 싶었으나 돌아서 나왔는데

          오늘 또한 벗어던지지 못하고 돌아서 나와야 했다 

 

 

 

           여승들의 특별 정진 법당 견성암, 신식 건물로 새로 건립되어 있다

            2층이 법당이라는데 창가에 여승을 바라보며 만감이 교차  

 

덕숭총림 수덕사(수덕사의 여승 사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속세에 두고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 ~ 수덕사에 쇠북이 운다

 

덕숭산(495m) 기슭의 유서 깊은 수덕사는 일엽스님의 애절(哀切)한 사연이 깃든 산사로 유명하다. 사하촌을 지나 수덕사길로 접어들어 조금가면 일주문 옆에 수덕여관이 눈길을 끈다.

이곳은 충남 문화재기념물 103호로 당대의 쌍벽을 이룬 두 폐미니스트 일엽스님과 서양화가 나혜석 그리고 고암 이응로 화백, 또 한 사람 일엽스님의 속세에 두고온 외아들 일당스님(김태신)의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녹아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문,사천왕문,여승들의 수도장인 덕숭총림을 지나 대리석 돌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에 이른다.

수덕사는 백제 때 창건된 고찰로 현재 우리나라 4대 총림 중 하나인 덕숭총림의 본찰로서,경내에 박물관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절이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지어진 국보 제49호 대웅전은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의 최고 목조건물로 손꼽힌다.

백제 계통의 목조건축 양식을 이은 고려시대 건물로 특히 건물 옆면의 장식적인 요소가 매우 아름답다.

또한 건립연대가 분명하고 형태미가 뛰어나 한국 목조건축사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 받고 있다.

대웅전 뜰에는 3층석탑, 범종각 등이 있으며, 덕숭산 능선에 위치한 정헤사로 올라가는 1천 20개의 돌층계길은 고요한 사색의 공간으로 좋고,정헤사 옆에는, 만공탑이 있다.

대웅전 서쪽 산중턱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比丘尼) 사찰인 견성암이 있는데, 이곳은 일엽스님이 이곳에서 출가한 곳이다.

일반적으로 수덕사하면 사찰보다, 비구니(比丘尼) 시인 김일엽스님과 얽힌 이야기가 유명하다.

수덕사 일주문 옆의 수덕여관은 한때, 당대(當代)의 내노라하는 시인 묵객(墨客)들의 발길이 잦던 유서깊은 곳으로 일엽스님과 속세에 두고 온 외아들 일당스님에 얽힌 애달픈 사연이 숨어 있는 곳이다.

한국 최초의 여류시인 김일엽(金一葉)스님은 평안남도 용강출신으로 이화학당, 일본 닛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한 여류문인 승려로 수상록 '청춘을 불사르고'등을 남기고, 특히 '수덕사의 여승'이란 대중가요의 모델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일본 수학시절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 열애로 김태신을 낳았으나 오다 세이죠가의 반대로 일엽은 수덕사 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여 붓울 꺾고 불자로서 정진하게 된다.

노랫말 처럼 속세에 이국땅에 두고온 사랑하는 사람과 외아들을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얼마나 울었을까?

이무렵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도 이혼을하고 여승이 되기위해 수덕사를 찾았으나 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

라는 거절을 당하고 수덕여관에서 5년동안 그림을 그리며 소일한다. 이때, 속세에 두고온 김일엽의 외아들 김태신과 인연을 맺는다.

어느날 일본에 두고 온 열네 살 소년 태신이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수덕사로 찾아온다.

나혜석이 거처인 수덕여관에서 모정이 그리워 바다건너 산넘고 물건너 찾아온 피붙이 테신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일엽은 냉정하게 대한다.

세 아이의 엄마인 혜석은 아들을 대하는 일엽의 냉정한 태도에, 일엽을 대신하여 태신이 모정이 그리워 이곳을 찾을 때마다 마치 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애에 굶주린 태신을 보살핀다.

이무렵 수덕사와 가까운 홍성이 고향인 청년화가 이응로도 수덕여관을 자주 찾아 그림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태신은 이들의 영향으로 후일에 유명화가로 변신한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34년부터 43년까지 9년간 그림을그리면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 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 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수덕여관을 사들여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수덕사를 떠난 나헤석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에 들어간다.

나혜석의 영향으로 이응노는 1958년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난다.

세월은 흘러 김태신은 화가로 성장하여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 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김태신(일당스님)으로 변신하게 된다.

일제시대 한국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그의 자전 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 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란 김태신의 자서전은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노인이 된 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 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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